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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Dec 29. 2023

윤회를 멈추고 열반하기 앞서

홍창성 교수의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강의>를 읽고

 부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물었던 적 있었다. 스님은 역정을 냈다. 부처님이라고 해야지, 부처가 뭐냐고. 우연인냥 필연인냥 홍창성 교수의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강의>라는 책에는 마침 똑같은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책에서 부처가 되는 법을 묻는 중생에게 스님은 "개똥이다"라고 답한다. 부처가 되는 방법이나 열반에 이르는 방법이란 말로써 묻고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우치기 위해, 스님은 개똥이라는 화두를 던진 것이었다. 그러면, 부처님이라고 해야 옳다했던 그 스님도 내게 같은 것을 알려주려 했던 것일까?


겨울에 눈 덮인 금각사 일본 교토의 유명한 관광 명소 금각사


  진리나 깨달음, 해탈, 열반 등을 찾고 싶어 어릴 때에는 이 책 저 책 나올만한 책들을 찾아다니면서 읽고, 비슷한 욕구가 있는 친구들을 모아 대화를 하곤 했었다. 그러다 절을 찾아가 스님에게 가르침을 갈구하다가 혼난 적도 있었고, 게임 계정을 만들 때에도 불교에 나오는 "공(空)"을 본받기 위해 nothing으로 지었던 적도 있었다. (나중에 와서 보니, 공(空)은 영어로 emptyness 였다.) 이제와 뻘뻘거리던 때를 갈무리해보니, 기억에 남은 말은 몇 자 되지 않지만 공, 윤회, 무아, 열반 등 몇 개는 아직 남아있다. 홍창성 교수의 책에 잘 설명되어 있었다.


 책은 깨달음(또는 열반, 엄연히는 두 개념이 다르지만 일반 독자를 위해 혼용하고 있음)을 얻고 생사고락의 삶의 윤회를 벗어나는 것이 불교에서 추구하는 진리라 한다. 그렇게 석가는 보리수 밑에서 "나에게는 무아요, 세계에는 연기"의 진리를 깨달아 열반에 이르러 윤회를 벗어났다(불멸, 성불)고 하는데 말로는 그 진리가 간단해 보이니, 진실로 깨닫는 것은 분명 말뿐이 아니렷다. 홍창성 교수의 말마따나 이러쿵저러쿵 스스로 공하여 무아하고, 고개를 들고 세계를 보니 모든 것이 또한 공하고, 이 공한 것이 인과하면서 또 비인과하여 연기한다는 사실은 꿀떡 넘어가듯 쑥 하고 이해되기도 한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이, 생사고락의 삶이 그토록 괴로운 것인가?


▲  자승 전 총무원장이 숨진 다음날인 30일 오전 경기 안성시 칠장사에 전날 화재의 흔적이 남아 있다. - 오마이뉴스기사 사진 발

 불교는 인생이 고통의 바다(고해)라는데, 그렇다면 나는 이를 멈추기 위해 나를 포함한 만물이 자성이 없어 공하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그리고 또 몸으로 받아들이고 이와 같은 삶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단 말일까.

 만물이 공하고 나 또한 그런 것은 알겠다만, 이 우리네 삶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냥 기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내 삶은 다시 그 삶은 마주하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로웠나 반추한다. 괴로웠던 때를 떠올리면 윤회의 고리를 끊어 다신 삶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옳다 싶다. 그러다가도, 그 모든 걸 겪어내고 지금껏 살아낸 나를 보니 마냥 그렇지도 않다. 스스로 대견하고, 또 자랑스럽다.


<마지막 4중주>의 한 장면(현악4중주 팀)


 다시 고민한다. 생사고락의 반복(윤회)을 멈추어야만 하는가? 야론 질버맨 감독의 영화 <마지막 4중주>라는 영화를 보면, 현악4중주 팀의 리더인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아프면서 벌어지는 나머지 팀원 간의 불화로 인한 생사고락을 보여준다. 팀 내 불륜 그리고 숱한 사건과 사고 속에서도, 그러나 결국 연주는 계속되고 좋고 나쁨은 나중 일이 된다. 삶도 그렇다. 좋고 나쁨을 넘어 우리는 우리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삶 속에서도 오늘의 삶 다음의 삶 그리고 그다음의 삶. 우리의 삶 뒤의 윤회를 끊어내기 전에,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지금 주어진 삶부터 긍정해야 되지 않을까.  


 "그건 늘 어려워요, 태어나는 것은요. 아시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를 쓰지요.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그 길이 그렇게 어렵기만 했나요? 아름답지는 않았나요? 혹시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았던가요?"  - 헤르만헤세의 <데미안> 중 애마부인의 말


 그렇게 지금 내 삶을 긍정한 후에는 깨닫고 윤회를 멈추는 일이 불필요한 일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내가 주어진 삶의 마지막 숨을 내뱉고 누군가의 앞에 선다. 그 누군가가 내게, "다시 태어나겠는가 아니면 그것을 멈추고 이쪽으로 넘어오겠는가",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수 있을까. 지나온 삶의 고난을 떠올라 괴롭고, 앞으로 있을 번뇌와 고통에 두렵다. 그만해야 할까, 삶? 그러나 계속되는 삶에서 부딪혀 다치더라도 일어나 극복하는 과정이 경이롭다, 삶.


 아무튼, 삶은 계속된다.


Hermann Hesse,<?>,(?)


참고자료 :

(사진) 겨울 금각사 사진

(기사) 자승 스님이 '소신공양'? 스님들에게 물었더니...

(그림) The Museum Hermann Hesse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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