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이고 무료한 하루하루를 몇 달째 보내다 보니 자연스레 어디론가 떠나 며칠 지내다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5월 캘린더에 있던 마지막 일정을 마무리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구글 지도를 켜고 마우스 휠을 마구 내려댔다. 가고 싶은 곳이 생길 때마다 지도 위에 꽂아놨던 수많은 핀들이 튀어올랐다. 이 많은 곳들 중에서 부담 없이, 마음 편하게 다녀올 수 있을만한 곳. 머릿속 복잡한 것들을 다 털어버리고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다 올 수 있을 만한 곳.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목적지에 대한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가 없었다.
요론(与論)은 규슈(九州) 가고시마(鹿兒島) 현의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누가 봐도 오키나와(沖繩)의 부속 섬 같은 위치에 있으면서 왜 가고시마 현 소속인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여튼 일본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섬을 알게 된 건 '안경(めがね , Glasses , 2007)'이라는 영화 덕분이었다.
요론 섬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이렇다 할 줄거리가 없다. 아침에 해변에 모여 이상한 체조를 하고, 그 날의 화를 면하게 해준다며 매실장아찌를 먹고, 바닷가에 앉아 사색을 한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섬의 일부분인 것처럼 평화롭고 잔잔하게 살아간다. 유명하지도 않은 이 영화를 작년에 우연히 보고 나서, '나도 언젠간 저기에 가서 사색을 하다 와야겠다'라고 다짐을 했던 것 같다. 그 다짐을 이렇게나 빨리, 즉흥적으로 실천하게 될 줄은...
요론 섬에 들어가는 방법은 대표적으로 2가지가 있다. 오키나와 나하(那覇) 공항에서 경비행기를 타거나, 나하항에서 페리를 타거나. 편도 기준 경비행기로는 50분, 페리로는 5시간 정도가 소요되는데, 인천-나하 구간보다 비싼 경비행기 값이 선택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페리는 편도 기준 3000엔 정도). 그렇게 여행을 결심한 지 일주일이 지난 오후, 바다 내음 섞인 잔잔한 바람이 부는 나하에 도착했다.
아는 누나가 '오키나와는 제주도 느낌'이라는 얘길 했었는데, 저녁을 먹고 돌아다니다 보니 정말 그런 느낌이 들었다. 특유의 일본 골목 감성이 들어간, 차 없는 제주 시내 느낌. 그렇게 천천히 나하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삐까번쩍 정신없는 국제시장 거리 초입에서 놀란 발걸음을 돌려 숙소로 들어와 일찍 잠을 청했다.
아침 7시에 출발하는 페리였기 때문에, 새벽 5시부터 일어나 준비를 하고 나하 항에 도착했다.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갔지만 수기로 다시 신청서를 작성해야만 했다. 신청서를 작성하고 표를 받으면서 어떤 배를 타야 되냐고 물어봤다.
'내 배는 어떤 거야?' / '저 뒤에 있는 거!' / '설마 저 큰 거?' / '응, 그거!'
나는 제주 성산항에서 우도를 오가는 배 정도 크기일 줄 알고, 뱃멀미를 할까 봐 새벽부터 잘 안 들어가는 삼각김밥도 먹고 멀미약도 챙겨 먹었는데. 큰 배라 그런 건지 5시간 내내 편하게 누워있어서 그런 건지, 뱃멀미는커녕 배 흔들림 조차도 편하게 느껴져 세네 시간을 잠들어 있었다. 그것도 선잠처럼 스윽 잠들었다 스윽 깨는 게 아니라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눈을 다시 뜨기가 힘들 정도로.
내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계시던 숙소(명성장明星莊-민슈쿠 묘조소) 사장님을 만나 차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었는데도 영어로 간단한 의사소통이 됐다. 덕분에 숙소로 가는 길에 사장님과 여행 계획, 섬 안에 있는 시내, 시설, 해변, 포인트 등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또, 숙소에 오는 외국인은 대부분 홍콩, 대만 사람들이고, 한국 사람은 오랜만이라는 얘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섬 안의 유일한 리조트인 프리지아 리조트(Pricia Resort Yoron)나 영화 안경에 나왔던 요론토 빌리지(Yorontou Village)에 숙박하는 모양이다.
섬에 도착하고 처음 만난 현지 사람과 편하게 대화를 하고 나서, 가장 걱정했던 의사소통 문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관광객이 오는 곳이라 역시...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섣부른 판단이었다. 섬에 머무는 3박 4일 동안 사장님을 포함해서 만난 여러 사람들 중에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사람은 단 4명, 심지어 그중 한 분은 영국인 카페 사장님이었다.
방에 짐을 대충 풀고, 스쿠터를 빌려 숙소를 나섰다. 변화무쌍한 섬 날씨답게, 짐을 푸는 사이 소나기가 내려 파랬던 하늘이 회색으로 변해있었다. 하늘은 흐렸지만, 방금 비가 그친 촉촉한 공기를 마주하며 논밭 사이를 달리는 기분은 최고였다. 그렇게 차도 없고 신호등도 없는(실제로 이 섬 전체를 통틀어 신호등은 단 하나밖에 없다) 한가한 도로를 달려 테라사키 해안(寺崎海岸)에 도착했다.
테라사키 해안은 영화 안경에서 동네 사람들이 아침마다 모여 체조를 하던 장소다(위 영화 포스터 속 장면). 영화에서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던 배경이라서 나 말고도 사람이 몇 명쯤은 있을 줄 알았는데, 삼각대를 세워놓고 혼자 체조하고 사진 찍고 돗자리에서 몇 시간을 보내는 동안 사람은커녕 차가 지나가는 소리조차도 안 들렸다. 모래사장이 그렇게 넓지도 않고, 뒤쪽으로는 풀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개인 해변 같이 아늑하게 노래도 틀어놓고 누워 쉴 수 있었다.
회색빛 하늘이 조금 더 어두워질 때쯤, 사장님이 알려주셨던 일몰 포인트로 향했다. 여긴 섬에서도 꽤 지대가 높은 편이라 섬의 서쪽이 다 내려다 보였다. 시내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중간에 있으면서 시원시원한 풍경에 벤치까지 있다 보니, 4일 내내 여기를 지나갈 때마다 스쿠터를 세우게 됐다. 주변에 초등학교, 중학교가 있어 하교 시간에 여기에 앉아있으면 피부가 새까맣게 탄 애들이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지나가기도 했다.
도시보다는 외진 곳에 오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밤하늘이었다. 원래는 빛 하나 없는 해변 모래사장에 누워 하늘 가득 찬 별을 보고 싶었는데, 그냥 숙소 앞에만 있어도 추웠기에 마당에서 보는 걸로 만족했다. 날씨가 흐려서 별이 안 보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구름이 달빛을 가려줘서 별이 더 잘 보였다. 이 다음 날부터는 구름 하나 없는 맑은 날씨가 계속됐는데, 달빛이 얼마나 밝은지 가로등 하나 없는 곳에서도 손전등 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