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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Jan 16. 2023

노예근성은 때로는 책임감으로 둔갑한다

조기퇴근은커녕 야근까지 한 건에 대하여

대상포진의 여운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오늘 아침 가시지 않은 피로감에

몸 한마디 한마디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다.

회사에는 병원 진료 때문에 늦는다고 말해둔 덕분에

제법 느긋하게 병원 진료를 받으러 갔다.


한방에 해결되는 주사라도 있으면 맞으려고 했으나

우선은 현재 주어진 약을 먹고 경과를 보자는 의사의 말에

큰 소득 없이 애먼 진료비를 지불하고 회사로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이야 당장 집으로 돌아가 두 발 뻗고 꿈나라로 향하고 싶었으나

꼴에 팀장이라고 책임감을 느끼는 것인지

스스로 막중한 업무를 맡고 있다고 되뇌고는 외선순환 열차에 몸을 실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사무실.

다 똑같았지만 오늘따라 몸은 더 무거웠다.

자리에 앉아 일을 하려는데

메스꺼움과 어지러움이 온몸에 밀려왔다.


'약해지면 안 돼. 오늘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잖아.

아무리 힘들어도 네가 제 역할을 해야 팀이 돌아가지.

그리고 회사도 돌아가고. 암 그렇고 말고.'


정신이 안개가 낀 것 같은 와중에

그렇게 머릿속에서 누가 하는지도 모르는 소리가 계속 울려댔다.


두세 시간 정도 급한 일을 마치고

조기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일이 도무지 끝나지를 않았다.

하나를 끝냈다 싶으면 다른 일이 눈에 들어왔고

이제 끝냈다 싶더니 팀원 일이 마무리가 안 돼서 불안하고

팀원 일이 마무리된 거 같더니 아까 이야기 못 나눴던 게 생각나서 붙잡고 이야기하고...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기퇴근은 커녕 업무시간을 꽉꽉 다 채우고 추가로 더 여유 있게 채웠다.


이게 정말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을지

아니면 미련하게 업무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지 못해서였을지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든지 빨리 업무를 끝내고

또 필요하면 내일이고 모레이고 쉬면 될 터인데

굳이 오늘 늦은 시간까지 힘든 몸을 이끌고

능률도 오르지 않는 시간을 보내야 했을까?

이 정도로 업무를 맺고 끊지도 못하고 끌려 다녀서야

일을 주체적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 모습은 역으로 일에 끌려다니는

아니, 스스로의 생각의 틀에 갇혀서 그것에 끌려다니는

노예와 다름없지 않은가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 스스로 자청해서 노예처럼 일을 들쳐 메고 다니는 모습을

스스로 알아채게 되자

알 수 없는 수치심과 분노가 떠오른다.


지금까지 거의 매일같이 야근을 하고

몸을 혹사하면서 건강에 악영향을 주고

하고 싶은 혹은 해야만 하는 다른 일들을

회사일을 핑계 대면서 하지 않았던 그 이유가

회사와 일에 대한 책임감과 소명도 아닌

노예근성과 그것을 빌미 삼아서 정말 해야 하는 것을 기피한 비겁함 때문이라니...


그리고 그 대가는 쓰디쓴 현실이라니...

내 생명력과 활기, 건강과 명료한 정신상태,

심지어 여가시간까지 들이부으면서

정작 생산적인 것이 남지 않았음에

분노를 넘어서 허탈함마저도 느껴진다.


사무실이라는 장소에서 직업이라는 옷을 입고

나 자신을 정신적인 안락함과 익숨함 속에 파묻어가며

스스로의 숨통을 조여 가고 있던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삶의 명확한 비전과 소명, 방향성이 없이

내 시간과 에너지와 생명력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다.

진정 내 삶과 일에 책임감이 있다면

깨어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에 반기를 들어라.

그 어떤 곳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노예의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칼바람이 부는 야생으로 나아가리라.

아니, 내 본디 있던 곳이 야생이었음을

사실은 한 번도 이 야생을 떠난 적이 없음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무한한 안광에 역사함이 서림을 목도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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