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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Jun 10. 2024

일요일의 주워 쓰기

#일기

0.

어쩐 일로 '5분만 더'를 이겨내고 상체를 스르륵 일으킨 일요일 새벽. 그때부터 내 안에서 부스러기들이 쏟아지고 있다. 머리를 감으면서, 옷을 입으면서, 알약을 먹으면서…… 주워 쓴다. 일단은 눈에 보이는 잡동사니부터. 대청소의 날이다. 글쓰기는 청소하기다.


1. 전쟁

계속 스테로이드제를 먹고 있다. 간밤에 성난 내 면역 세포들과 스테로이드 군대의 극렬한 싸움에 전신을 뒤척였다. 내 안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폭탄과 화염이 난무하는 전장, 내 몸은 그 자체가 된 것만 같다. 그것은 끝없는 메슥거림과 화끈거림과 그것을 제압하려는 인공적이고 파괴적인 어떤 힘의 대결이었다.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새벽에 기진한 채 일어났다. 나의 백혈구들은 도대체 무엇을 향해 폭격을 퍼붓고 있는 것일까. 남들보다 민감한 것은 마음인가, 몸인가. 뭐가 이렇게 성이 났는가. 약물의 편법적으로 끌어와 임시 휴전을 맺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언젠가는 그들도 나를 도와주지 못하겠지.


2. 전기장판

이불 패드 아래 넣어둔 작은 전기장판을 드디어 뺐다. 6월 9일에야 전기장판을 완전히 끄다니, 나는 당최 어느 계절에 살고 있는지.


3. 독서망양

책과의 접촉면이 줄어들고 있다. 나는 일상 곳곳에 달뜬 상태로 앉아 사라져 가는 지평선을 바라본다. 어떤 노력으로도 열이 내리지 않는 환자처럼. 출근 전에는 하루를 지탱할 유순하고 신선한 활자들을 마시기. 버스 안에서는 전자책을. 회사에서는 산만한 환경에서도 빠져들 수 있는 책 위주로. 저녁에는 최대한 끊지 않고. 야식으로는 냉장고에 붙여둔 시를 몇 알씩. 마지막으로 마음에 드는 책갈피로 오늘의 대문을 잠그기. 이불속에 몸을 누이면 현실은 최면 같고 책 속은 만취 세계 같다. 책 밖은 온통 도서관이다. 세상이 다 도서관으로 보인다. 저마다의 고독이 도사리는 쓸쓸한 서가들도…… 밤이 깊었습니다. 그만들 촛불을 꺼야겠지요.


나는 도무지 실과 울리면서 살 수는 없는 사람인가.


그리 되었나 보다.


4. 희망 연체

절반도 읽지 못한 책을 연체했다는 사실에 아연해졌다.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내가 처음으로 받은 책이었다. 나는, 월화수목금토일의 노동에 치여, 나의 유일한 희망을 연체한 것이다.


5. 탁월한 캐스팅

20대 여사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대규모의 팀에 들어오게 됐다. 어느 무리에도 섞여들지 못하고 있다. 나는 언제나 스웨터 한 섶에 책을 끼고 유령처럼 라운지를 떠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떠나고 난 뒤 홀로 그림자로 잔류할 때, 이대로 볕에 말라 사라졌으면……한다. 소강되고 싶다. '-고 싶다'는 것은 희망일진대, 나는 그것을 이미 연체했으매. 털썩. 그만둔다. 다시, 사물들을 생각하며 어슬렁거린다. 그림자로 어른거린다. 눈의 초점 거리를 달리 해 보는 일에 빠져든다. 고개를 눕혀 세상을 가로로 바라보기도 한다. 것이 이번 스테이지에서 나에게 배정된 고독한 역할 같다. 탁월한 캐스팅이다. 나만큼 이 역할을 잘 해내는 사람도 없을진저.


6. 저도요

"예뻐지기 위한 노력이죠." 나는 마치 성형과 미백을 위한 손님들로 꽉 찬 피부과에서 홀로 대기하는 질병 환자 같다. 그들의 병원과 나의 병원은 다르다. "저도요"라고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 집, 가족, 자동차, 여름휴가. 대화는 여기저기서 절단된다.


7. 사람들

누군가 나에게 책에 등장하는 구도자 같다고 했다. 누군가는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적이 없다고 했다. 누군가는 내가 불편한 같다. 누군가는 내가 '홀로'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내가 '홀로'라는 부사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holo. holo. 나는 잠깐의 순간에도 우두망찰 몽상에 빠져들지요. 결코 제정신은 아닙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나에게 말을 건다. 자기는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말을 건다면서.


8. 그러게

그러게…… 당신은 잘 있어?


9. 술과 노래

사람들과 술을 마시지 않는다. 건배사가 난무하는 회식 자리를 간신히 버틴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알면, 아마도 이중 인격자로 체포되지 않을까. 사람들과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노래방에 가서 라인별로 대항전을 갖자고 한다. 나는 두려움을 넘어 놀라워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렇게 큰 목소리를 낼 줄 아는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멘트가 준비되어 있구나. 모두가 자신만의 노래가 준비되어 있구나. 나는…… 목구멍이 가시밭길이다. 마시면, 노래하면, '찔린다'.


10. 환골탈태

오래전 영상공의 옷을 벗어 태워버렸으며 온갖 단축키가 달라붙은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나는 환골탈태한 자다. 열망도 난망도 옛일. 헌데 여상한 세계에 앉아 있다. 가느다란 전생의 추억이 스친다. 그 순간 손가락이, 절로 춤을 추며 편집을 하기 시작한다. 말짱 도루묵!


11. 부활

심각하게 오래된 폰이 드디어 고장 났다. "한마디로 골병이 들었다 이겁니다". 놀랍게도 고장 난 부분이 고쳐졌다. 호시탐탐 한탕을 노리던 상인의 웃음이 잦아든다. 며칠 동안 내 폰이 고장 났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 그 사이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12. 이사

기준을 낮춰 집을 보러 다녔지만 적당한 집을 찾지 못했다. 사람은 더 가난해졌고, 집은 더 부유해졌고, 은행은 더 엄격해졌다. 친구가 작고 귀여운 집으로 찾아보라고 충고를 해 주었다. 무리 둘러봐도 작고 끔찍한 집밖에 없었다. 더? 여기서 더?


13. 시간

숲 속에서 시간은 '불가산 명사'였는데, 도심 속에서 시간은 '가산 명사'로 바뀐다. 시간이……없다.


14. 천 원과 천만 원

외진 곳에 위치한 집 하나가 후보군에 올랐다. 미래의 알바비까지 끌어다 계산해 보아도 천만 원이 모자랐다. 천 원 아니고 천만 원. 하늘에서 천만 원만 떨어졌으면 좋겠다. 쓰리잡 중이지만 악덕 클라이언트 건은 아직 보수를 받지 못했다. 주말 알바 쪽에서 휴가자 대타를 더 뛰어줄 수 있는지 연락이 왔다. 네, 네! 가능합니다! 아무렴, 천 원이라도 벌자.


15. 소나기 같은 잠

 생신인 것도 모르고, 그저 소나기처럼 쏴아아아 자고 싶다고 생각한 하루가 지나갔다.


16. 발췌독

어떤 문장을 찾으려고 온갖 메모장을 뒤지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오랜만에 들춰본 문장들. 다시, 무디게 전율한다. 내일이면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도, 찾으려 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릴 것이다.


16-1.

에밀리는 천사의 난폭함을 보이며 털어놓게 된다. 자신은 한 번도 어머니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고, 어머니란 우리가 불안에 사로잡힐 때 의지하게 되는 분이 아니겠냐고. 어머니란 무엇인가에 대한 완벽한 정의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려면 결핍보다 나은 것이 없다. -크리스티앙 보뱅, <흰옷을 입으신> 중


16-2.

어머니는 말했다. 만약 네가 되돌아오면, 밥에 독을 넣어 너를 죽여버릴 테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부영사> 중


16-3.

"어쩌면 너는 아이가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앞서가던 여승이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네 안에는 아주 늙은 네가 살고 있을지도 몰라. 늙은 그녀가 너무 이른 시기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해라." -배수아, <뱀과 물> 중


17. Closed

아침에 러브 버그가 빽빽하게 기승을 부리는 것을 보고 충격을 좀 받았다. 볕이 좋았는데 손님이 거의 없었다. 아무도 없는데도 문을 닫고 싶었다. 그 모든 문을. 세상 도서관들을.


이만 끝내야겠다. 자고 일어나면 다 잊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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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밤 새우다) 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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