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점심시간, 카페. 샐러드에 커피까지 런치 할인 16500원. 허락된 시간은 12시부터 1시. 이토록 세속적인 시간에, 이토록 세속적인 장소에서, 이토록 세속적인 포즈로 앉아, 나는 무엇 때문에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노트를 펼치고 펜을 들었나.
절망은 갑작스러운 적 없었다. 한 줄의 글을 읽다가 눈물이 핑 도는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닌 것처럼. 한순간 덜컥이라든지 갑자기라든지 하는 부사가 철없이 엉겨 와도 절망은, 그대로 둔다. 절망은 자애롭다. 그러든지 말든지. 절망은 평정하다. 주변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절망이다. 나는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일상적인 표정으로 카페에 앉아서 비건 샐러드를 먹으며 죽음을 생각했다.
출근길 버스 안에서부터 줄곧 이어진 생각이었다. 하마터면 업무 시간에도 그 생각을 할 뻔했다. 업무란 것은 고작 4개월 차인 나에게 너무도 익숙하여서 나는 거의는 냉소적으로마저 작업을 할 수도 있었다. 내가 그것을 사랑했던 험난한 시간에 비하면 이깟 포즈는.
(이 일의 계약이 끝나면. 이 집의 계약이 끝나면)
(또 그 문장이야?)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유예된 안락한 계약 기간 안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씩 들이킬 때마다 나는 삶에 취한다, 취한다아, 무섭다, 사는 게 무섭다. 죽음보다 삶이 더 독하다아.
구조 조정을 당했을 때, 전세 사기를 당했을 때, 그 모든 의욕과 희망의 실직자로서 나는 살기 위해서 오직 글을 썼으며 책을 읽었다. 어쩌면 반복되는 나의 난독은 살아남으려는 본능 때문인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평면적인 지면을 붙잡고서 그중 어느 문장이 튼튼한지(내 몸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어느 그늘 아래 몸을 숨길지만을 절박하게 탐독했을 뿐. 어깨를 곱송그리고 책을 읽은 것은 사실은 도둑 같은 응큼함 때문이었으며, 반드시 가려야만 했던 부끄러움 때문이었으며, 독서라는 포즈의 경망스러움 때문이었으리라.
임시로나마 이직과 이사를 해낸 지금 역시 조금도 다르지 않다. 나는 사람들과 농담을 하고 돌아선 순간 다시 생각난 시 한 구절에도 울 수 있다. 우울 또한 갑작스러운 적 없었다. 나는 줄곧 시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므로 다시 돌아서면 웃을 수도 있다. 돌아서지 않아도 웃을 수 있다.
(사는 건 아슬하게 리셋되는 다이너마이트 게임 같아요)
이 계약을 도움닫기 삼아 저 계약으로 뜀박질을 하다가 최적의 순간에 공중을 향하여 핑 그 르 르 … … 잽싸게 몸을 날려야 하겠지만…… 모두가 적시에 날아오를 수 있는…… 그런 세상은 아니잖아……
일과 집의 계약 놀음이 끝나는 그날, 나는 이 사치스러운 절망의 도시로부터 떨어져 나와 면벽의 시간을 갖고 싶다. 삶이라는 독주를 끊고 스스로 흰 종이 위로 걸어 올라가 너무도 많은 문장을 훔치며 살아온 나 자신을 흐득흐득 고백하며 자수하고 싶다.
죽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야겠다. 내가 진정으로 가지고 있는 살고 싶음의 실체를, 그것의 맨살을, 모체를, 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과연 살아 있는 채로 직접 건져 올려. 무엇이 나를 삶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는지. 어느 주소에서 기인한 그리움인지. 절망이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참으로 태연자약한 너, 살고 싶음이여.
죽고 싶은 사람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 배고픈 사람이 감사하며 먹을 줄 알고,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은 사람이 스쳐가는 인연들을 더욱 사랑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