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라 Dec 14. 2024

퇴사 D-500

D-500

직장인의 12월이란 술자리의 연속이다. 피한다고 피해 보지만 다른 때보다 의무적인 저녁 일정이 많아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나에게 무리 생활은 언제나 버겁다. 너무 많은 술자리는 오히려 나를 절주하게 한다. 너무 많은 음식 또한 나를 위악감에 휘말리게 한다. 그리고 술은 역시, 혼자 마시고 싶다. 


며칠 전 어쩌다 끌려간 사내 재경 동문회에서는 순진하게도, 그래도 대학 시절의 시간이나 공간 따위를 공유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자리는 다른 어느 곳보다도 일신 영달과 고속 승진을 위한 장이었다. 아직도 이런 것에 실망하는 내가 조금 실망스럽다. 테이블을 돌며 술잔을 주고받는 이들은 목소리가 크고 화통했으며, 더듬거림이 일절 없었다. 재경 모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누구에게서도 시골스러운 구석을 찾아볼 수 없었고, 후배들도 도무지 후배 같지가 않고 차가웠다. 나는 그 자리에서 유일한 비정규직이었다. 나는 맨 끝에서 망태자루처럼 앉아서 조용히 술을 마시다가 도망쳤다. 읽다 만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데서 시간 낭비나 할 셈인가.




퇴사가 약 500일 남았다. 약 7개월 전, 생활이 위급하여 최저가에 경력을 팔고 막차에 몸을 실었다. 7개월 동안 느리게 빚을 갚고, 느리게 살을 찌웠다. 그러나 존재의 불안은 여전하다. 강마른 영혼은 살찌기를 두려워한다. 출근하는 날들이야말로 내 삶의 휴가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잊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답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일기를 쓰자.


10번째 회사에서 퇴사를 앞두고 하루하루 일기를 쓰며 버텼다. 매일 밤 글 속에서 세상과 멱살잡이를 하다가 환부에 붕대를 감고 끙끙거리다 잠들었다. 퇴사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노와 패배로 점철된 퇴사 일기가 아니라, 그저 생활을 기록하듯 차분한 (그러므로 산만하고 수더분한) 퇴사 일기를 쓰고 싶다.





우리는 너무나 바쁘게 살고 있다. (...) 그런데 그 모든 것은 파스칼이 말하듯,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의 근원적 공허를 보지 못하도록 막는, 혹은 죽음으로 가로막혀 있는 이 불가해한 삶에 대한 질문을 유보시키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이 모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철학적 사색의 근본 토양인 권태에 빠져들지 못하게끔 막는 한낱 유희는 아닐까?

-장 그르니에, <존재의 불행> 中




어쩌면 나는 다만 쓰는 행위를 하기 위해서, 쓰는 시간 자체를 늘리기 위해서 일기를 쓰고자 하는 건지도 모른다. 쓰고 싶은 말을 한정 없이 써 내려가다 보면 마지막으로 남는 건 결국 '쓰는 나'뿐이다. 그때 비로소, 쓰기를 쓴다. 그쯤 되면 내가 무엇과 싸우고 있었던 건지, 왜 그토록 필사적으로 써야만 했는지, 결기와 패기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다. 누가 나를 쓰는 것인가. 무엇이 쓰여지고 있는 건가. 모든 게 가물가물해진다. 좌절도 슬픔도 약간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그것이야말로 일기 쓰기의 최대 소산 아닐까. 




2024.12.12. 목. 휴가.


겨울이다.


오전 10시쯤 이불 밖으로 나왔다. 자취방의 공기는 유령처럼 서늘하고, 방바닥은 맨발로 걷기 힘들 만큼 시리다. 겨울에는 이불 밖으로만 나가도 외출하는 기분이 된다. 외출의 감각에서만큼은 은둔자만큼 전문가가 없다. 그동안 생업으로 인해 누구보다 바빴는데도 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기분이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겠다. 너무 바빴던 것이다.


책상 위에는 아침 햇살이 가득 고여 있었다. 홀리듯 걸어가 책을 펼친다. 이유 없이 휴가를 쓴 건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전기 조명이 아닌 햇빛 조명 아래, 책을 읽고 싶었던 것이다. 작은 전기 난로를 켠다. 속세에서의 내 존재를 끈다. 사라짐을 감각한다. 무엇이 사라졌나. 미래를 모색하려는 생존의 본능과 살아있음 자체의 막연한 불안이다. 켜고 끈다. 쓰고 지운다. 있음이 없음이 된다. 전환됨으로써 무화되 것들을 바라본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 것은 나의 본업이 맞다. 


카메라도, 글쓰기도, 술 마시기도, 사실은 나의 본업은 아니다. 술 없이도 지극한 시간이 흘러간다. 회사에서 휴가를 쓴 덕에 오늘은 본업에 충실했다.




2024.12.14. 토. 퇴사 D-500


-퇴사 일기의 제목(브런치북)을 고민 중이다.

좀 남세스럽지만 기획 의도가 확실하고 살짝 귀엽기도 한 [500일의 윈터]

또는 [있음과 없음], [지나가 버렸음], [이제 거기 없음]. 다소 건조하지만 나의 정서가 잘 반영된.

그래도 이런 고민은 재미있다.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 대통령 탄핵안 가결.


생업과 피로에 절어서 마지막 순간까지 갈등했지만, 안 나가면 후회할 것 같았다.

 개인의 절망이 내 현실의, 내 도시의, 내 나라의 절망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안다.

해야 할 말을 해야 한다면,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파에 밀리고 밟히며 힘들었지만 잘 다녀온 것 같다. 이제 후회는 없다.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나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대통령 놀이 재밌는지. 제발 우리 좀, 살게 해 주세요. 살고 싶게 좀 해 주세요. 살려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