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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Nov 19. 2024

빚 갚는 기쁨

#일기

오늘은 백수 기간 동안 빌어 먹은 밥값과, 죽살이로 매달렸던 이사와, 여름날 모자라는 보증금으로 구구절절 빌린 돈들을 청산한 날.


'은행'에게 빌린 돈, 다 갚았다!

(오늘같이 기쁜 날에 보증금과 학자금은 논외로 합시다요.)


빌어 먹은 돈, 빌어 살은 돈, 모오오오오두 헌납했다. 최저 시급으로 연명해 온 허름한 청춘, 꿈에다 희망까지 두둑하게 이자 쳐서 싹 긁어 드렸다. 됐냐, 이것들아. 속이 시원허냐.


, '사람'에게 빌린 돈을 다 갚았다. 은행에게는 빌릴 자격조차 되지 않아 산 넘고 물 건너 굽이굽이 메꾼 구멍. 인간 못 될 마음으로 처처빌어 먹은, 그래도 기댈 데는 은행뿐이라 어떻게든 콸콸 끌어다 자분자분 돌려 막기도 했던, 행여나 밉보일라 급급하게 채워 넣은 사람 구멍. 내가 나를 못 믿어서 십만 원씩, 이십 만원씩, 생길 때마다 밑두리콧두리 퍼날라서 보낸 못난 나를 견뎌준 그대들, 정말로, 정말로다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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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0이네. 스무 살 적에는 밑도 끝도 보이지 않던 꿈의 0이네. 내 나이 마흔이 다 되어가네. 흰머리는 왜 이리도 유난히 많은지. 은행에다가 청춘을 팔아먹은 대가이련가. 나 드디어 꿈을 이뤘네. 검은 머리 빨리 주고 얻었네.


책 샀어요.


서글퍼라. 나를 위해 책 한 권, 술 한 잔, 선물하는 밤이에요.


최승자, <마흔>
최승자, <애기 동자를 위하여>


삼십 대는 높은 벼랑으로부터 끝도 없이 추락했다면, 사십 대는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재수 없는 망망 평야라고 하던데. 나는 뭐 하나 믿고 갈지. 갈 수는 있을지. 얼마나 더 막 돼먹을 날들일지. 네에 네에, 아무렴, 기대되고 말고요. 가고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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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애기 동자, 이리 오련. 네 엄마야. 오늘 엄마가 기분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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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 마약도 하지 않고, 범죄도 짓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왔어요. 오늘은 너무 빨리 취했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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