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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Dec 21. 2024

13년 만의 학자금 청산… 원샷!

D-495,494,493

2024.12.19. . D-495

<back up>


인사 발령과 송별회, 송년회의 연속이다. 그들 세계의 변두리에 보조 장치처럼 대기하고 있는 존재들이 있다. 비정규직이자 말단 사원들은 각각 주어진 머릿수 하나 당의 몫을 담당해야 한다. 이에는 적극적인 참여와 풍부한 리액션, 매력적인 외모와 달콤한 재치가 필요하다. 그것도 없다면 세월에 의해 사회화된 선택적 사교성이나 어설프지만 용기 있는 쇼맨십, 허술하고 음침한 정치력이라도 있으면 된다. 그것마저도 없어서 임무를 완수하기 버거운 이도 있다는데……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1인 분의 머릿수도 채우지 못하는 1인들은 어찌한다.


하여간 송별회 자리에서는 책임자나에게 보조 역할을 부탁했다. "세라 씨, 뒤에서 백업 좀 해주세요." 10명 남짓의 사람들이 무대 위에 서서 한 명 한 명 소감을 발표하며 뭉클한 시간을 가졌다. 나는 맨 뒷자리에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울고 웃는 동그란 얼굴들. 무감한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표정들콸콸 흘러 넘쳤다. 나는 그들처럼 잘 시작한 것도, 잘 끝낸 것도 없었는데 하염없이 따라 울다가 따라 웃었다. 어떻게든 1인 분을 해결하려는 듯이.


사전에서 '백업하다'를 검색해 보았다.

1. 체육 야구 따위에서, 수비자의 실책에 대비하여 그 뒤에 다른 수비자가 대비하다.

2. 정보·통신 잘못된 조작 때문에 데이터나 정보 파일이 손상되는 것에 대비하여 똑같은 파일을 여분으로 디스켓 따위에 복사해 두다.


여러분, 걱정 마세요. 당신은 나를 모르지만, 내가 여기서 당신의 실책을 대비하고 있답니다. 당신의 웃음과 울음을 제 얼굴에 복사해 뒀어요. 마음껏 조작하고 마음껏 즐기세요. 당신은 어떠한 실수에도 손상되지 않을 거니까요.


무대 위에는 내가 만든 영상이 상영되었다. 나는 내가 만든 영상을 보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들의 표정을 촬영했다. 녹화. 복사. 저장. 무엇의 앞이든 내가 있는 곳이 뒤다. 이 정도면 오늘의 백업은 잘 수행한 거라 봐도 될까?


휴.


그들, 이라는 아늑한 주어 속에 몸을 빼꼼빼꼼 숨기는 나날이다. 이것도 백업의 일종 아닌가. 이게 영상쟁이의 숙명이지 뭐.




2024.12.20. 금. D-494

<원샷>


드디어, 정말이지 드디어, 학자금을 청산했다. 대학교 졸업 후 13년 만이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 긴 긴 날이었다. 13년 동안 11개의 회사를 다니며 수많은 아르바이트와 백수 생활, 여행자 신세를 병행하였고, 16군데의 고시원과 하숙방, 원룸을 떠돌았다. 그러는 사이에 마흔에 가까워졌다.


드디어 '드디어'를 제대로 쓴다.

드디어.

내 통장의 역사는 지금부터 시작하는 거다.


이게 뭐라고, 울컥.


내 마음은 그랬다. 이를테면 건배사도 없이(그래도 MZ세대인데 건배사는 좀 촌스럽잖아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원샷!


(당신도 원샷, 해주시겠어요?)


오랫동안 가난이라는 죄명으로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오늘, 기다려주는 이도 없이 세상 밖으로 출소하여 원샷을 외친다. 그래요, 원샷. 다시 한번, 원샷. 새로 시작할 세상이 눈앞에 있다. 그 세상을 믿지 않는다. 그래도 술 한잔 정도는 받아주겠지. 세상에는 홀로 술잔을 드는 서글픈 마음들이 있기 때문에. 내 글이 읽히는 곳마다 술집이기를, 오늘은 욕심내 보는 밤이다. 거기가 어디든. 당신이 누구든.


(그런데 아찔하네요. 또 시작해야 한다니.)




2024.12.21. 토. D-493


오래전부터 학자금 대출을 완납하는 그날을 그려왔다. 그날이 오면 무엇을 할까. 어떻게 자축할까. 상큼한 딸기 생크림 케이크와 드라이한 레드 와인 한 잔,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던 순간이 있었고, 그때부터 저녁 메뉴를 정해뒀었다. 하지만 정작 어제는 연이은 회식으로 피로에 절어, 친한 친구와의 저녁 약속까지 취소하고 자취방에 들어와 흥청망청 기절해 버렸다. 아주 작은 꿈조차도 이렇게 허무하게, 자신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랬지. 꿈은 허무. 그랬었지.


아침에 일어나니 창밖은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다. 방 안의 고요를 조용히 휘저어 본다. 침실에서 화장실로, 화장실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서재로. 이 모든 건 단일한 하나의 공간이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다녀야 했던 하나의 외로운 영혼처럼. one room.


책을 펼친다. 책 위로 내려앉는 겨울 햇살을 읽는다. 읽히는 게 꼭 활자라는 법은 없으니. 물을 마신다. 결국은 커피나 허브차를 마시게 되겠지만, 일단은 투명한 물을. 소리조차 우려내지 않은 나만의 차가운 공간 속에서 조금만 더, 느슨해진 영혼을 유지하고 싶다. 떠다니는 먼지들이 포슬포슬하다. 누가 내 자취방에 눈 내리는 장면을 복사해 두었을까. 사물들 가운데 나홀로 소요하는 장면은 마치 한 장의 사진 같다. one shot.


오후에는 커피와 허브차, 둘 다를 마셨다. 저녁에는 침묵마저 마시고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그러다가 부엌 앞 방바닥에 주저앉아 책을 읽었다. 갑자기 그러고 싶었다. 책을 읽다 고개를 들어 보니 변기와 세면대가 보였다. 화장실 앞이다. 하지만 책상 옆이기도 하다. 서서도 읽고 앉아서도 읽으며 방구석을 유랑하다가 다시,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아무 문장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알코올처럼 취했던 한때의 고요. 모르겠어요. 나 만취했었나 봐요.  


12월 25일과 1월 1일도 이렇게 보내게 될 것 같다. 이렇게 보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퐁당퐁당,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제일 좋은데.



찰칵.


문득 하나의 장면을 움켜쥐는 순간, 오늘이라는 셔터가 철컥, 문을 내린다. 꿈은 허무. 허무한 것이 꿈만은 아니겠으나. 그랬지. 그랬었지. 하루치의 시간도 포슬포슬하게 사라지네. 거기에 내가 잠시 살았던가. 안녕, one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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