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2. 일. D-492
한강 작가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5번 이상 들은 것 같다. 무언가 있긴 있는 걸까. 외적인 분위기가 닮았다고 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내적인 분위기, 즉 생각이나 태도가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다. 어쨌든 분위기라는 단어는 내외 어느 하나만을 뜻한다고 볼 수 없다. 며칠 전 어떤 이는 나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강 작가와 비슷하지만 내가 조금 더 힘 있는 느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한강 작가 쪽에서 기분 나빠야 할 이야기다.
한강 작가의 책은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내 기억이 맞다면, 4권 읽어봤다. 시간이 꽤 지난 터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없다. 각각 <디 에센셜 한강>,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채식주의자>,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다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가 시도 소설도 에세이도 동일한 강도로 좋았다는, 그 점에 있어 나에게는 꽤 희귀한 작가였으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은 <희랍어 시간>이었다는 것. 그러나 그보다 나와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무엇이냐 하면,
한강 작가가 오랫동안 적자의 독립 서점을 운영했었다는 사실. 나는 언젠가 책방을 운영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만) 있다. 지금도 주말에는 이렇게 책방 알바생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책방이 아니더라도 나는 늘 적자였다. 외적이고 내적이고, 사실은 고작 이런 걸로 닮았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그만큼 감히 닮지 않았다.)
"오, 있다!"
상념에 잠겨 있는데 한 남자아이가 귀 바로 옆에서 기습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라서 홱 돌아보았다.
"저 이거 뒷내용이 너무너무 궁금했는데, 이 책이 여기에 있어서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내 버렸어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는 아까부터 웃음소리까지 내가며 책을 읽던 그 아이가 왠지 사랑스러웠고, 먼저 고개 숙여 사과까지 하는 모습이라면 굳이 주의를 줄 것도 없어 보였다.
"그 책 좋아하나 보네요?"
아이는 16권까지 봤는데 17권이 어쩌고 재잘대더니, 책 속으로 성큼 들어가 버렸다. 내가 책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꼭 저럴까. 독서하는 사람은 책과 같은 정태적인 상태로 돌입한다. 이따금씩 페이지가 펄럭 넘어가듯 가끔 기지개를 켤 뿐, 그의 영혼은 평수에 구애받지 않는 작은 책꽂이 속에 콕 처박혀 있다. 때문에 언젠가 내 책방의 평수는 아주 작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낭만에 잠시 젖어들었다. 아이는 누나가 집에 가자고 데리러 왔는데도 가기 싫다며 책꽂이 앞에 서서 남은 부분들을 절박하게 더듬어 읽었다.
오늘은 모처럼 공백이 좀처럼 나지 않아 3시쯤 되어서야 겨우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동네 할머니들이 한바탕 몰려와 떠드는 탓에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잊고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아아 힘들어어. 빈 공간에 소리를 던져본다. 퐁당. 소리는 홀로 일었다가 홀로 사라진다.
손님들이 가끔 물어본다. "책 대여도 돼요?" 내가 일하는 곳은 대여는 안 되고 보는 것만 허락된, 서점이라기보다는 도서관에 가까운 곳이다. 그러니까 여기는 말이지요,
대출 불가. 빌려줄 수 없음. 가지고 나갈 수 없음.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알바생 주제에 책이 반출되지 않음에 이상한 안도감을 느낀다. 왜일까. 이 많은 책들 중 단 한 권도 내 것도 아닌데. 나도 작은 평수에서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싶은 걸까. '오 있다!'의 순간들을 내 두 눈으로 촬영해두고 싶음일까. 아니면 한 오백 년 전에, 그 소년과 만난 적 있었나. 내 것도 아니면서 대출 불가를 선언하는 뻔뻔한 마음이, 거기에 있었더랬다. 한강 작가의 마음과 닮은 점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말이다.
오늘은 산길이 얼어서 꽤나 미끄러웠다.
운동화는 하나뿐이라 종종걸음으로 아껴 걸었다.
이런 하루라면 나쁘지 않은지도 모른다.
이렇게 별 것 아닌 하루도 애써 기록하려는 내 마음을 바라본다.
.
.
"글 쓰는 거 좋아하나 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