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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500일

읽는 자에게는 빛이 필요하나니

D-311

by 세라


금요일 저녁, 대문을 닫았다.


이 문은 월요일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이다.




생길 약속도 생기지 않을 약속도 사전에 모두 취소하고, 어둠 속에서도 암막 커튼을 쳤다. 어딜 가도 누굴 만나도 나의 싫음을 감추어야 하고 싫음이란 건 멈춰지지가 않아서 사는 건 늘 피곤하다. 싫음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피로다. 그리고 그 피로에서 다시 한번 싫음이 유발된다. 그건 싫음 중에서도 가장 큰 싫음이다. 뭐 애써 거절하지 않아도 거의 늘 혼자지만……


나는 '더' 혼자됨을 원해요. 누구와도 '약속됨' 없는 상태를 원해요.


오늘 밤 문만 잠그면 혼자가 될 수 있다는 거, 행운이야.




읽고 쓰기에

애원하는

불화하는

저주하는

그리워하는

그 모든 나에게서 한동안 멀어졌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왔다, 라니.


책갈피를 끼워둔 곳이 시시로 주소를 옮겨 다녀야 하는 삶의 번지수라도 된다는 건가. 아주 잠깐의 착각. 돌아갈 곳은 없다.




회복하듯 조금씩 읽기 시작한다. 예전만큼 많이 읽지는 못한다. 그래도 읽지도 쓰지도 못해서 죽을 쑤고 술을 푸던 날들보다는 낫다. 홀로 책상에 앉아 묽은 에세이를 한 숟갈 떠먹는다. 드디어 입맛이 돈다. 책을 덮고 나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다만 조금 힘이 나고 그거면 됐다. 이렇게 조금씩 읽어나가다 보면 언젠가 가벼운 소설류도 꿀꺽꿀꺽 읽을 수 있겠지.




얼마 전 서점을 어슬렁대다가 스치는 두 여자의 대화를 들었다.


"이 책, 표지 너무 예쁘다!"

"헐, 완전 갖고 싶어."

"그런데 에세이네? 그럼 당연 패스지."

"그치, 돈 쓸 정도는 아니지."


패스, 라는 단어가 귓가에서 까슬까슬 흩어졌다. 쓰여지기도 전에 패스당할 글 같은 거, 술지게미처럼 쏟아내는 사람 여기 있는데…….




문득 나는 지금 내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게 아니라, '들어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오늘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다만 과거에 술에 취한 내가, 기어코 오늘의 술까지 앞당겨 마셔버린 그 술주정뱅이가, 지금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것 아닐까. 밤은 부드럽고 취한 사람은 다정하니까.




당신은 책 속에 주소가 있습니까. 영혼이 머무는 한 장 한 장, 거기가 집이었던 적 있습니까. 한 권의 책이 문을 닫을 때마다 우당탕탕 이사를 다녔던 적…… 있습니까.




점심시간마다 불 꺼진 사무실을 배회하며 햇빛을 찾아다니던 내가 있었다. 웅덩이처럼 명도(明度)가 고여 있는 곳을 발견하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시집을 펼쳤다. 흐린 창가 아래, 블라인드 틈새, 약간의 햇빛만 주어져도 나는 읽었다. 읽어야 했다. 배가 고팠다. 목이 말랐다. 단 한 줄의 글이라도 나는 마셔야만 했고, 마시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했다. 최소한의 빛, 빛. 읽는 자에게는 굴광성이 있어서 그토록 삭막한 빌딩 안에서도 햇빛을 향해 나는 기어이 목을 내밀었던 걸까. 시간과 시간의 틈새, 바위와 바위의 틈새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최소량의 곡기인 흙과 수분 햇살으로 나는,


읽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



읽는 자에게는 빛이 필요하나니.

읽는 자에게는 빛이 필요하나니.

읽는 자에게는 빛이 필요하나니.




읽는 자는 빛을 향해 나아가리니.




대문을 열었다. 일요일 오후였다. 내 오랜 고독의 정원을 향해 걸어갔다. 나의 검은 새와 함께. 언제나처럼.



유월의 정원에서는 작은 블루베리들이 핑크빛 몽상에 빠져 있었고, 심장 모양의 계수나무 잎들이 부지런히 캐러멜 향을 모으고 있었다. 초여름의 열기 속에서도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은 신비주의자와 나무 그늘 아래 명상하는 구도자에게도 인사했다. 찰칵, 은쑥 한 무더기과 새 한 마리를 향해 합장하는 마음으로 셔터를. 찰칵. 나비여, 놀라지 마시게.


그리고 또 한 번 카메라를 들었을 때, 수백 수천 개의 벼가 일제히 흔들렸다. 그 순간 나는 여름 햇빛을 향해 저항 없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아…… 나는 지금



식물들의

굴광성을

이해한다




살고 싶은 자에게는 빛이 필요하나니.



흔들리는 건 풀, 반짝이는 건 빛, 멈춘 것은 나. 그러므로 피사체는 나. 포착된 건 착각.

.

.

.


*최소량의 곡기인 흙과 수분 햇살: 박라연 시, <영구암 육체론 1>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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