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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500일

사람아, 사람아, 그만하자.

D-306

by 세라

멀쩡한 약속을 취소하기 위해 거짓 통보와 사죄 연기를 하며 집으로 돌아온 하루. 고되다, 고되다, 아아, 죄 없는 사람들이 왜 이리도 고된가.


맹세하건대 나는 누군가와의 약속을 헐값으로 사고파는 사람이 아니다. 나의 독서 시간과 내 영혼에 필수적인 고독을 우선적으로 안배하면서 선별된 인원과 신중하게 약속을 잡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당일이 되면 몹시 핍진하고 허심하여, 도저히 누구도 만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위장이 틀리는 같았다. (사실 이 둘은 나의 단골 손님이다.)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다. 고되서다. 당신이 좋지만, 고되다. 그 이상 무어라 변명할 수 있을까. 돌려 생각해도 퇴근 후에 사람들과 만나서 술과 음식을 마시고 먹고 인생 네컷 따위를 찍으러 하얗디 하얀 스튜디오를 깔깔거리며 돌아다닐 자신은 없다. 사회적인 시간을 참아내며 독기에 체하는 나의 내장을 나는 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미안해요, 야근이 길어졌어요. 오늘 나는 가지 못할 것 같아요.


'약속 취소'에 있어서 나는 경력직이다. 웬만한 충동에 길항하는 인내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으로 나는 그에게 애원한다. 정말 미안해요, 나를 용서해 줄 수 있어요? 다음에 나를, 다시 만나줄 수 있어요? (마지막 남은 친구들을 둘, 하나, 잃어가고.)



이런 날이면 나는 악마적인 음주를 갈구한다. 죄책감과 배덕감은 너무 혹독하다. 거절은커녕 나는 타인에게 한순간도 냉정하지 못하다. 나는 오직 나 자신에게 거침없는 삼엄을 휘두른다. 나는 이제 누구와도 교제할 수 없는 존재가 돼버린 걸까? 내 방문은 언제 열리고 언제 닫히는 걸까? 그리고 지금 나에게 필요한 책은 무엇일까?


이런 날에는 대체로 재독이 낫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끄적였던 흔적은 오늘 같은 순간 진가를 발휘한다. 아무 데나 펼쳐도 곳곳에 책갈피처럼 꽂아둔 내 영혼의 진수를 만나는 거다. 오, 파지할 수 없는 나의 본령이여. 그런데 그 순간, 다시 한번 폰에서 빛이 반짝인다.


"이번 주 주말에 볼 수 있어?"


사람아, 사람아, 그만하자. 연화되어 가던 나의 영혼, 마침내 사나워진다. 고물폰, 꺼버리고 싶은 충동.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음악이 꺼지는 걸 원치 않았다. 나는 폰과 스피커를 블루투스로 연결해서 음악을 듣는 21세기의 현대인이라. 그런데 음악? 음악이라면 글렌 굴드지! 책장에서 글렌 굴드를 찾아 휙휙 펼친다!


'활기는 그를 피곤하게 했고, 감정의 표명은 그를 녹초로 만들었다'

'고독을 그는 낡고 닳도록 사용했다'

'자신의 삶의 밀실 속으로 타인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굴드, 그러면서도 가장 은밀한 옆방, 문 하나가 빠끔히 열려 있기를 바라는 굴드'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내가 있다. 이런 식으로 나는 몇 권이나 재독할 수 있다. 시절 인연과의 재회이자 고독의 복습. 나는 보후밀 흐라발의 '한탸'처럼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그때, 스피커에서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이 흘러나온다.


'내가 전에 올라가 봤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줄까?

봉우리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곤 생각진 않았어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


귓가에서 시가 노래하고 새가 날아오른다.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나의 밤이 흘러간다. 나는 이 도시에서 제일 가는 환희의 인간이 된다. 두루마리 같은 밤, 영원한 밤, 어느새 죄책감은 희미해지고 시간은 부족해진다. 아니, 약속을 취소하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일기를 마무리하려 하는데 또 맥락 없이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 최치언 詩 제목


으음, 설탕 같은 고독이 쏟아지는 밤이라는 건가. 오늘밤 내 설탕의 바다에서는 멸치잡이 배가 시원시원하게 문장을 낚아올리고 있다. 만조 아래 갓 건져 올린 문장들이 파닥거릴 때, 내 영혼은 싱싱한 은빛으로 빛난다! 아, 청신한 밤, 환상적인 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도 이런 기분을 느꼈으려나. 나는 내 삶의 냉정함과 혹독함을 모조리 잊어버린다. 당신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내 단골 손님들을, 잊어버린다.


'나의 생각이 산만하고 무질서하게 웅성거리며 나온다 해도 그것이 내게 심상하게 일어나는 타고난 방식임을 사람들은 알아주기 바란다. 나는 아무 장식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놓는다.' - 몽테뉴 <수상록> 中


나의 문장 편력이 정신 분열의 수준에 이를 때쯤, 지인이 한 문장을 보내온다.


'결국 우리는 단편작이야. 수록된 작품 하나하나가 다 완벽한 단편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 만큼 읽었다. 성공작이 있으면 있으면 실패작도 있다. 운이 좋으면 뛰어난 작품도 하나쯤 있겠지. 결국 사람들은 그 뛰어난 것들만 겨우 기억할 뿐이고, 그 기억도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 가브리엘 제빈, <섬에 있는 서점> 中


아마도 나는 운 나쁜 문장들을 계속 쓸 것이다. 끝까지 복권에 당첨되지 못할 평범한 문장들도, 계속해서 쓸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쓸데없는 메모들을 계속해서, 계속해서 휘갈겨 쓸 것이다.


나는 나만의 밀실, 나만의 지하, 나만의 천국에 있어요. 한탸처럼.


'이 책상 앞의 나라는 잔해 더미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지 모르지만, 광채를 뿜어낼 빛의 덩어리처럼 여기 있다.' - 조르주 바타유, <불가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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