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89
2025.07.13.日
나는 일기를 씀으로써 일기를 쓰지 않으면 되었을 나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일기를 씀으로써 조금 더 고독한 사람이 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일기를 씀으로써 조금 더 부드러운 사람이 되는 것도 같다. 아무리 칼날처럼 날카롭고 우물처럼 서늘한 문장을 쓰는 날이라도, 쓰는 사람은 달밤에 백지 앞에 홀로 앉아 자기 자신을 하소연하고 있는 연약한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고, 페소아는 적었던가. 어쩌면 연민은 쓰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고독뿐만 아니라 사랑 역시, 내게 쓰는 행위를 요청하는 것이다.
나는 보통 사람보다는 조금 더 쓰는 사람이지만, 보통 사람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기억력이 나쁜 축에 속한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쓰기에 대해 뭔가 오해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언제나 나를 반대 방향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기억하기'가 아니라 '기억 안 하기'의 쪽으로. 진화론적 관점에서 최선의 사랑 쪽으로. 그리하여 다소 무책임한 쪽으로. 사실 어느 정도 잊지 않고서는 과거의 나를 감당할 수가 없다. 내가 미래에서 기대하는 건 희망이 아니라 망각이다. 망각이 희망이다. 언젠가 미래에 도착하면 나는 제일 먼저 과거에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나 아직, 여기에 있어." 과거는 미래를 용서해 줄까? 그래도 내가 아는 나라면, 용서해 줄 것이다. 그쪽에서도 분명 망각을 희망하고 있을 것이기에.
처음 500일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잊지 않기 위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잊기를 희망하면서 쓴다. 다만 잊기를 목표하면서 쓰는 것은 아니다. 희망과 목표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기를 쓸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불행이라는 기본 상태'로 데려다 놓기를 반복해 왔던 것 같다. 때로 미래가 원하는 것은 '기억하기'가 아니라, '기억 안 하기'인 줄도 모르고. 나를 미래로 데리고 가는 것은 불안과 강박이 아니라, 망각과 용서, 그리고 고독한 글쓰기다. 결국 숫자 세기도 모두 끝날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계속해서 씀으로써, 그저 쓸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떤 500개의 상실이라도 종이처럼 부드럽게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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