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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500일

나의 가을 안거 주간

D-200

by 세라

#책


밤이 길어지고 있다. 이 시기의 나는 행복하다. 여름이라는 파란만장을 어렵게 끝내고 낮의 기세가 시나브로 사위어 갈 때, 나는 촛불을 켜고 잎차를 우리며 점점홍 사라져 가는 빛을 보충한다. 곶감처럼 아껴뒀던 새 책을 펼친다. 제법 묵직한 이 책의 두께는, 내가 미리 주문해 놓은 시간의 두께다. 책값을 지불하던 순간에 나는, 책상 앞에 그만큼 앉아있겠노라고 나 자신과의 종신 계약에 사인을 한 것이다. 계약은 성사되었다. 그리고 책 앞에서 나는 을이다. 읽기와 쓰기는 나의 착오, 상상, 수치심, 내면의 저열함까지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어슬렁대며 피해 다니는 '행복하다'는 말까지도, 이 계약에서는 정면으로 허용한다.



#차


책상 앞에 앉아 묵묵히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 나의 손님에게, 오늘은 귀한 우롱차를 대접한다. 투명한 다기에 더운물을 따르자 잎 속에 오랜 세월 잠겨 있던 햇빛과 바람이 꿈틀꿈틀 퍼져나간다. 농익은 향기. 짙어지는 물. 달큰한 침묵. 그 순간이 너무나 벅차고 향기로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잎이 아니라 꽃이나 열매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취해도 좋으리라. 열기가 한 소끔 식은 차는 안전하게 식도를 훑고 지나가며 지친 위장에 뭉근한 감각을 선사해 준다. 이만치 속사정 알아주는 이가 또 있으리. 내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찻잎의 눈물이여, 고맙고 미안하다. 여음처럼 감도는 두 번째 향에, 그늘진 곳의 노을 같은 세 번째 색에, 오후 내내 간단없이 취하였다.


책 또한 한 장 한 장 차분하게 음미한 다음, 단지 마지막 행위로써 넘긴다. 팔랑, 한 페이지. 팔랑, 또 한 페이지.



#비


세상은 열흘째 비와 안개가 휩싸여 있고, 나는 투명한 숙우 속에 잠긴 찻잎처럼 우묵하고 섬세한 정취에 취해 있다. 아하, 가을 장마로다. 가을도 좋고, 장마도 좋고. 나는 홀로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숲을 걷고, 촛불을 켜고 명상하는 일을 지겨움 없이 반복한다. 하루하루 절하는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고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중으로 따지자면 파계승인지라, 세상의 꽃을 마시고, 잎을 마시고, 뿌리를 마시고, 바위를 마신다. 끝없이 탐하고 끝없이 식한다. 나의 어리석은 가을 안거 주간이다.


비 내리는 숲에 들어서면 입구서부터 설탕 냄새가 났다. 어떤 나무가 그토록 전대미문의 달콤한 냄새를 풍겼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바람이 불자 나뭇잎들이 소리 내어 한 존재를 환영해 주고, 휘어지고 쓰러진 나무들이 여기저기서 팔을 벌려 우산을 씌워주었다. 나는 멈추어 서서 청설모가 마시는 공기를 마시고, 새가 먹는 콩배를 따 먹는다. 내게 맛있는 이 열매는 새들에게도 맛있을 것이다. 내게 우산이 되어준 이 나무는 새들에게도 우산이 되어주었겠지. 여름에는 너무 뜨거워서 느끼지 못했던 따뜻함, 여름에는 너무 차가워서 느끼지 못했던 시원함이 양쪽에서 나를 알싸하게 감싸 안는다. 따뜻함과 시원함이 뒤섞이며 내 존재의 일부로 합성된다.



#여름


여름이 어렵다고 말하는 내게, 누군가 '당신은 여름을 타는군요.'라고 말했다. 그게 내 얘긴 줄 몰랐다. 언제나 여름이 끝난 뒤에야 그것을 깨닫는다. 38번째 그러고 있다. 내게는 여름의 모든 것이 지나치다. 혹독한 에너지, 정신없는 유혹, 한여름밤의 섬망 속에서 내가 태어났다. 내 몸은 여름에 태어났을지 모르나, 내 영혼은 지구가 한 소끔 식은 뒤에 합류한 것이 분명하다. 때로 내 몸과 내 마음이 불화를 일으키는 것은 이러한 생래적 불균형 때문이리라.


올해는 여름이 잃어버린 장마를 가을이 실천하고 있다. 내 몸과 내 마음이 만나는 계절. 열흘동안 나는 날개 달린 단풍 씨앗처럼 행복하였다.



#햇빛


마지막 날에는 햇빛이 났다. 별안간 책 위로 볕뉘가 소복소복 내려앉았고, 나는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빛을 보았다. 책을 보았다. 이제야 정말로, 책을 본 것이다. 나는 그동안 책 자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고, 이번에는 영혼보다 몸이 더 늦게 도착했음을 알았다. 가을이다. 나와 내가 만나고, 책과 책이 만난다. 햇빛이 내 안에서 나의 정신과 더불어 곧바로 당으로 합성되고 있다. 낮은 짧아지고 있지만, 햇빛도 설탕도 충분하다.


흐린 연휴 동안 의식의 흐름대로 쓴 메모 조각들. 두서없지만 기록해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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