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동 카페
장마에 일주일 내내 비가 내렸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고 친구에게 일 마치고 보자는 연락을 했다.
모두가 그렇듯, 나에게도 마땅히 맡아야 할 여러 역할이 있다.
거창하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20대 사회인으로 이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부모님의 자식으로, 형제로, 친구로, 선후배로, 연인으로, 팀원으로
수많은 역할을 잘 해내기 위해 혹은 해내기 위해 욕심부리며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다.
오늘도 그랬다.
왜 다들 나에게만 그럴까 억울한 기분도 들고
나란 존재가 소비되는 것을 강요당하고 압박받았던 날이었다.
그래서 더 조용한 한남동에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친구를 만나 늘 먹던 오마일에서 저녁을 해결 후 언더프레셔로 향했다. 조용한 한남동임에도 언더프레셔만큼은 늘 웨이팅이 있곤 했다. 역시나 먼저 들어간 친구가 말했다.
"2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는데?"
언더프레셔는 기다릴 가치가 있다.
"기다리자."
주택을 개조하여 누군가의 집 같은 외관.
안으로 들어서면 전시된 것처럼 홀로 공간을 지키고 있는 가죽의자가 눈에 띈다.
일하는 직원들을 완전히 오픈된 모습으로 볼 수 있는 커피바. 그 앞으로 베이커리와 콜드브루가 병에 담겨 진열되어 있었다. 메뉴판만 보아도 커피맛에 잔뜩 힘을 주었음이 느껴졌다. 마시멜로가 올려진 타르트 스모어를 시킬까 했지만 디저트는 다음에. 오늘은 라떼 40보다 진한 라떼 60으로 주문했다.
진동벨 대신 번호표를 받아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서면 밖에서 본 것보다 좀 더 넓게 느껴지는 공간이 있다. 유명해진 데에 인테리어도 한몫한 것이 느껴졌다. 조명 덕분에 전체적으로 브라운 톤이 공간을 감싸고 골드 소품으로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특히 가구를 세심히 고르고 골랐으리라 예상해보았다.
카페에 많이 쓰이는 대리석 테이블, 색을 고심했을 다양한 의자, Bluebottle이 생각나는 언더프레셔만의 파스텔톤 푸른색 강조 그리고 푸른색이 돋보이는 셀프바, 눅눅한 장마를 잊게 해주는 곳곳의 식물들
2층은 자리가 없어 1층에 앉았다.
번호표를 가지고 있으면 주문한 음료는 직원분이 직접 가져다주신다.
빈브라더스처럼 원두에 대한 설명이 적힌 카드를 주어서 적힌 단어들을 상상하며 커피 맛을 음미했다.
라떼는 고소했다. 그리고 진했다.
대화조차도 쉴 틈 없이.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 부정적인 이야기들이었다. 힘이 되진 않았지만 잠시 숨은 돌릴 수 있었다. 씁쓸한 마무리다.
카페를 나오자 밖의 어둠이 안에 드리워 조명을 더 빛나게 했다.
장마에 일주일 내내 비가 내렸다. 긴 장마기간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탔었다. 물방울이 맺힌 유리창이란 필터로 보는 세상이 좋았다.
빨강 노랑 초록 자동차 전조등과 신호등 빛의 번짐도 좋고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물을 잔뜩 머금은 바퀴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라디오 소리도 좋다.
무엇보다도.. 한남대교 북단으로 향할 때 한강과 무수한 빛을 내는 남산타워가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서울임을 확인시켜주었다. 해야 하는 생각들 말고 순식간에 의미 없이 지나가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들이 좋았다.
너는 말했었다.
들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너의 말들이 지금은 조금 알 것 만 같았다.
정답은 우유부단하다. 우유부단하기에 상황에 따라 쉬이 변한다. 그래서 모두들 최선의 답을 만들어 가고 있다. 흙탕물에 흙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기도, 안개가 걷히기를 또는 벗어나기도 각자에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언더프레셔는 압박받는 나에게 잠시 한숨 쉴 틈을 주는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