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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석 Jul 24. 2019

사진과 기억하기

<김군> 강상우, 2018

사진에 등장하는 얼굴은 말이 없다. 말이 없는 얼굴에서 보수논객은 북한 군인을 찾고, 사진작가는 사진에 찍히는 것에 대한 불만의 눈빛을 기억하고, 주먹밥을 나누던 이는 죽지 않았으면 했던 청년을 찾고, 그때 함께했던 이는 이름을 떠올릴 수 없는 친구를 기억한다. 2019년의 가치들과 격리되어 카메라가 딸깍 소리를 낸 80년 5월, 그 순간의 순수한 상태로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은 얼굴은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수많은 형태로 변주된다.  


보수논객은 광주의 5월 당시 찍혔던 사진들의 얼굴들과 북한의 여러 행사에서 찍힌 얼굴들의 유사성을 열심히 나열하며 광주로 내려와 폭동을 일으킨 북한군 600명의 존재를 입증하려 한다. 그리고선 30년의 세월이 지날 때까지 그 누구도 이 사람이 누구라고 말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덧 부친다. 말과 이름이 없는 사진의 얼굴엔 그렇게 ‘광수 1호’라는 이름이 부여된다. 영화는 북한에서 건너온 군인이라는 뜻의 ‘광수’라는 이름이 부여된, 그중에서도 첫 번째를 뜻하는 광수 1호의 얼굴에서 출발한다.      

<김군>은 80년 5월 당시 광주를 촬영한 사진에 지목된 ‘광수’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궁극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광수 1호’의 정체를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사진이 건네는 단서들과 그 순간에 존재들의 기억이 결합하면서 80년의 5월은 생생한 현장으로 때론 뿌연 안개가 낀 장면으로 재구성된다. 그렇게 사진의 얼굴은 북한 행사 속 로열석에 앉는 북한 인사가 되었다가, 먹을 것을 얻어먹던 넝마주이 김군이 되었다가, 틀림없이 이강갑 씨가 되었다가, 자신보다 먼저 툇마루에 나갔기 때문에 총알에 맞은 친구가 된다.     


‘광수 1호’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 얼굴에 이름이 생기고 태어난 날짜가 밝혀지고 그의 생의 이야기가 부여되는 것, 그리고 국적이 확인되는 것. 그것은 누구의 승리일까. 보수논객, 그리고 한국과 미국의 깃발이 나란히 걸린 깃대를 흔드는 사람들의 패배일까. 영화는 광수 1호에 이름이 부여되는 순간이 승리의 순간이 될 것이라는 믿음에 의해, 적어도 그에 대한 기대의 힘으로 추진력을 얻지만 ‘수사’는 승리의 순간에 가까워지듯 한 순간에 한 없이 멀어지는 운동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 반복의 운동 사이에서 영화는 승리의 순간에 대한 달콤함보다 더욱 무겁고 부정할 수 없는 힘과 마주한다.      


<김군>은 남겨진 사진들의 나열을 통해 광경을 재구성해보기도 하고, 사진 속에 나타난 상세한 특징들을 살피며 당시 조직과 그 구성원들의 작동원리를 짐작해보고자 한다. 사진의 인물을 찾는 행위를 통해, 사진의 여러 가능성을 살피는 행위를 통해 영화는 무엇을 살필 수 있고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시험하는 듯하다. 그 과정에서 사진이 말해줄 수 있는 것과 살아남은 자들이 기억하는 것의 결합이 발산하는 힘은 ‘광수 1호’의 정체를 밝혀내고자 하는 방향이 가지는 힘을 넘어선다.     

사진은 그 순간에 특정한 생각과 목적과 생각을 가지고 존재했었던 개인들, 그 중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의 문을 잠시 들여다볼 수 있는 열쇠로서 작동한다. 그 과정을 통해 발화되는 이야기들의 무게는 기억을 뒤집어내어 이름을 찾아내어 부여하는 것이, 자신의 앞에 먼저 나서서 총알을 맞은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는 목적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주먹밥을 받았던, 죽지 않았으면 했던 이의 이름을 기억하는 목적이 아니라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어떤 변화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사진이 말해줄 수 있는 것, 그리고 개인들의 기억들이 누구도 의문을 표할 수 없는 명제의 지위를 획득할 수 없다는 점은 애초부터 이 ‘수사’의 한계점이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을 통해 그에게 '알맞은' 이름이 부여될 수 있었던 다른 세상에서, 그 이름이 저 보수논객과 그의 말에 동의하는 이들을 설득시켰을 거란 상상을 하기란 쉽지 않다. 이는 <김군>을 본 어떤 관객의 감독을 향한 “그래서 결국 지만원 씨의 과학적인 방법을 반박하지 못한 거군요”라는 발언의 괴담스러움 만큼이나 선명하다. 하지만 <김군>이 결국 도달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하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영화는 계속해서 ‘광수 1호’의 정체를, 이름을 밝혀내려고 노력하지만 이야기의 무게는 조금씩 남겨진 사진을 바라보고 기억하는 행위 그 자체의 것으로 넘어간다. 어두운 상영관, 사진들이 비치고 이미지 속 인물들이 객석에 자리 잡고 스크린을 바라보는 장면은 다소 노골적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진다. 큰 화면으로 보니 또 달라 보인다는 말처럼 큰 화면을 통해 이미지들을 마주하고 기억하는 행위. 그것은 ‘살아남아 줘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말만큼이나 온전히 살아남은 자들의 것이며 분명한 것이다.

      

사진을 통해 나타나고, 합쳐지며 늘어나는 기억의 무게가, 미처 꺼내지 못한 총알의 이질감만큼이나 분명해질 때, 서로 결코 설득할 수 없는 북한군의 존재는 얼마나 작아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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