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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석 Sep 07. 2016

가족의 신성함을 걷어내고

<태풍이 지나가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6

한때 행복하고 화목했던 가족 사이가 와해된다. 재난, 너무나 악하기만 할 뿐인 악역, 금전문제 등으로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 위협을 받는 사건이 발생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희생을 주저하지 않는 헌신적인 태도로 위험에 처한 구성원을 구한다. 마음을 닫고 있던 구성원은 사건을 통해 가족의 가치를 깨닫고 주인공의 사랑을 인정하며 관계를 회복한다. 더욱더 화목한 가족이 탄생한다. '가족'을 그리는 영화에서 그리고 가족이라는 요소가 등장하는 영화들(그러니까 아주 많은 영화들)에서 공식처럼 사용되는 스토리라인이다. 많은 경우 갈등은 父-子간 혹은 父-女일 때가 많은데 영화가 끝날 때쯤 자신을 희생에 이 세상에 더 이상 없거나 병상에 누워있는 父인물을 자녀 인물이 눈물을 머금고 회상하거나 바라보면서 갈등은 매듭지어진다.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는 '부산행'이 생각난다. 주인공 석우는 딸인 수안에게 너무도 분명하게 좋은 아버지가 아니다. 그가 바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을 비난할 순 없지만, 딸에게 똑같은 선물을 두 번 줄 정도로 관계에 소홀하면서 그녀를 계속 데리고 있으려는 태도는 비판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딸과 함께 좀비로 가득 찬 KTX를 타게 되었을 때 석우는 말 그대로 온몸을 바친 희생을 통해 딸을 지켜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헌신적인 희생을 깎아내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마지막 순간을 너무나도 하얀 방에서 너무나도 하얀 옷을 입은 석우가 딸 수안을 행복하게 안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아버지로서의 그의 소홀함을 '용서'하며 딸을 향한 무한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영화적으로 석우라는 아버지를, 그의 방식을,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인정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가족 안에서의 조건 없는 사랑은 영화, 드라마, 예능을 가리지 않고 많은 매체에서 거의 신성하게 여겨지며 그려진다. 가족 구성원들끼리의 사랑은 분명 존재한다. '가족'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함께 생활을 공유한 개인들끼리의 정과 사랑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렇듯, 가족 안에서의 사랑은 신성하지도 않고 당연한 것 또한 아니다. 우리가 가족 앞에 '신성한', '무조건적인' 같은 수식어들을 붙일 때(부산행에서 시각적으로 그러하듯이) 가족 구성원의 기존의 행동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면서 논의가 불가피하게 된다. '너를 사랑해서 그렇다'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때로 아주 폭력적인 말이 된다.

가족을 그리는 영화에서 이러한 모습들은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태풍이 지나가고'는 기대가 되는 영화는 아니었다. "당신은 원하는 어른이 되었나요?"라는 다소 진부한 카피를 가진 영화의 내용을 큰 줄기로서 바라보면 '태풍이 지나가고'는 기존의 가족영화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지 모른다. 떨어져서 서로 마음을 닫고 있던 구성원들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 장소에 함께 있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이 과정을 통해 서로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일이 벌어지는 러닝타임 동안 다른 많은 가족영화가 사랑으로 갈등을 포장함에 따라 주었던 불편함을 느끼길 걱정하며 있었지만 크레딧이 올라올 때까지 그런 느낌은 받지 않았다. 그렇게 '태풍이 지나가고'는 다에게 '다른' 가족영화가 되었다.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도 다른 영화들과 같이 장애물들이 등장한다. 장애물들은 금전적 문제이기도 하고 서로를 대하는 태도 안에 존재하곤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기존에 내가 보아왔던 영화들은 이러한 장애물들을 결국 등장인물들이 가족으로서 넘어서야 할(해결이 아닌) 것들로서 바라보았다. 가족의 사랑이라는 신성한 가치를 부각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이상적 가족형태로 다가가기 위해 이겨내야 할 관문으로서 말이다.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는 이 문제들을 실질적인 문제로서 인식한다. 인물들은 신성한 가족과 사랑의 가치를 만들고 유지시키기 위해 힘쓰기보다 자신의 조건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얘기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때론 찌질하기도 하고, 파렴치하기도 하며, 매정하기도 하다. 영화는 그 행동들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여주기보다 그 인물이 어떠한 배경과 상황 속에서 선택을 해나가는지 그리는데 힘쓴다. 그 배경 속에서 인물들은 서로 부딪히고 비난하고 이해하며 관계 속에서 어떤 방향인지 아직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용기 내어 한 발짝 나아간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장애물들을 하나의 관문으로서 바라보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바라보며 인정한다.


보통의 영화들에서 갈등이 매듭지어지고 화목함으로 나아가고 있었을 때쯤, 그러니까 태풍이 지나가고 난 후, 긴장상태가 조금 풀렸을지 모르지만 갈등은 해결되어있지 않다.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라는 매체에서, 매듭지어지지 않는 이야기는 영화적 경험에서 미완결의 찝찝한 기분을 주기 마련이지만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는 단호히 그렇지 않다. 영화는 가족의 신성함을 통해 갈등을 매듭짓는 방식으로 인물들을 가두려고 하지 않는다. 가족관계는 인간관계이다. 누군가가 디자인한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가는 계단은 인간관계에서 없다. 인간관계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며 끝을 알 수 없는 오르내리막길이다.

영화에서 요시코(키키 키린 역)는 료타(아베 히로시 역)에게 바다처럼 깊은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료타는 엄마가 또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구나, 라는 태도로 그녀에게 엄마는 해본 적이 있냐고 되묻는다. 그녀가 이제 그녀의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겠구나 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녀는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런 사랑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라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고 평온한 그녀의 표정으로 얘기한다.


영화를 통해서,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서 가족의 모습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 바쁜 모습들을 너무나 자주 볼 수 있다. 누군가가 정했을지 모른 이런 '이상향'은 누군가로 하여금 자신의 가족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게 만들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구성원에게 상처를 주게 하기도 한다. 미디어에서 그려낸 '화목한' 이미지를 쫓아갈 때,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장애물을 결국 가족의 힘으로 넘어서야 할 것 따위로 치부할 때, 우리는 오히려 그 화목에서 멀어진다. 바다처럼 깊은 사랑, 가족의 가치로 모든 것을 이겨낸 화목한 가족은 모두 실제로 존재할지 모르지만, 그 신성함으로 얼룩진 모습에만 집중했을 때 우리는 서로를 행복이란 것에서 한 발자국씩 더 떨어지게 만들고 있을지 모른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그런 모습을 좇지 않아도 괜찮다고 얘기해준다.


+키키 키린이 연기하는 요시코에게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 아름다움은 '할머니'라는 그녀의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그 정체성을 포함함 '요시코'라는 그녀의 인물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녀의 연기는 마침내 그 인물이 되고 마는 것이기보다, 대사 한마디를 통해서, 손짓, 팔짓 하나를 통해서 나에게 요시코를 소개해주는 과정으로 느껴졌다. 그 모습이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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