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몰리션> 장 마크 발레, 2015
현대사회의 우리는 완제품에 익숙하다. 태초에 어떤 모습에서 출발하였을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모습으로 진열되어 있는 제품들을 우리는 편리하게 구입한다. 때로 우리는(적어도 나는) 제품 설명서를 보고도 제대로 제품을 사용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 우리가 고장나버린 물건을 만났을 때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과, 직접 고치는 것. 물론 건드리면 문제가 커져 버릴 걱정부터 하는 나는 거의 항상 전자를 선택한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든 내가 직접 문제를 건드리고 고쳐야 하는 상황들이 있다. 운 좋게 물건을 분해하고, 파악하고 다시 조립을 하게 되었을 때, 직접 해결하게 되었을 때, 거기서 오는 어떤 희열감이 있다. 완제품 상태에서는 미지의 문제였던 것을 분해하여 그 세계를 보고 이해하는 데서 오는 희열감.
물론 모든 문제가 단순하고 아름답게 분해되진 않는다. 조금만 개인의 능력을 벗어나는 기술, 원리가 들어가도 그 문제는 '분해 불가'가 되기 십상이다. 문제의 '내부 세계'가 나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사실이 확실해졌을 때, 그 과정은 더 이상 즐거운 것이 아니게 된다. 때로 이 상태에서의 진행은 문제를 더욱 크게 만들어버릴 뿐이다. '분해'하고 '이해'하기 위해 호기롭게 뜯어내기 시작한 행위는 원상태로의 복구라는 최종 목표로 가지 못하고 문제의 물리적 파괴로 이어지기도 한다.
데이비스는 분해한다. 집착처럼 분해한다. 데이비스의 장인어른은 그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분해해보아야 한다는 말을 했었다. 아내의 사고 후 이 말은 그의 머릿속 깊숙이 박힌 듯하다. 그는 삐걱거리는 화장실 문을 분해하고, 이상한 소리가 나는 냉장고를 분해하고, 그의 사무실을 분해하고, 장인어른의 괘종시계를 분해하고 싶다고 얘기한다. 그는 실체가 있는 사물의 영역을 넘어서 태풍에 쓰러져있는 나무와 같은 어떤 현상이 상징하는 바와 그것에 대한 자신의 감정상태까지 새롭게 바라보고 분해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분해하려고 한다.
데이비스의 분해가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화장실 문과 그의 사무실처럼 정갈하고 왠지 아름답게 분해된 것들도 있었지만, 그의 냉장고와 커피 기계는 결국 파괴되었다. 냉장고와 커피 기계의 내부 세계는 그의 한계를 넘어섰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모든 문제의 전문가가 아니며 유한한 또 한 명의 인간이다. 이런 그가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인간관계를 분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더욱이 관계의 다른 쪽에 존재하던 사람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없다.
데이비스는 실체가 없는, 상대도 없는 이 문제를 분해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한다.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자신의 결혼생활의 과정과 자신의 감정을 적은 편지를 쓰기도 하고(그가 언급하듯이 이 편지는 누군가가 읽어주길 위해 쓴 것이 아닌 쓰기 위해 쓰인 것이었다.), 그 편지로 만나게 된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도 한다. 이런 과정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른다. 관계를 분해하기 위해 새로운 관계를 맺어보는 방법은 왠지 본질로 다가가는 느낌이 있기도 하고 그가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얘기할 수 없는 문제였다는 점에서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상대방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관계를 분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계는 태생적으로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비슷할 수 있지만 독립적인 두 세계가 만나서 만들어지는 관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복잡하다. 상대방이 존재할 때, 관계 속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자신이 느끼는 바에 대해 절대 확신하지 못하는 인간의 천성 때문에, 혹은 언어로 하는 의사소통의 한계 때문에 너무나 어려워진다. 상대가 존재하지 못할 때는 함께 쌓아 올린 관계에서 상대방 쪽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기에, 결국 그것을 짐작하는 것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해진다. 사고로 죽은 아내완의 결혼생활을 분해하려는 데이비스의 행동은 결국 분해의 영역에서 파괴의 영역으로 급격히 넘어간다.
문제를 분해하는 과정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때, 한계에 부딪힐 때,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이면서 비겁한 행위가 파괴이다. 자신이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것을 부정하는 것. 무력으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파괴하는 행위는 개인에게 또 다른 희열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것을 '파괴하는 행위'는 그것의 특성상 유의미한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파괴에서 오는 희열감은 무언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데 있을 뿐이지 물체의 물리적인 파괴는 존재했던 문제를 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
자신이 파괴하다 남은 집, 자신과 아내의 침대에 데이비스가 누워있다. 많은 것들이 분해되었고 파괴되었지만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분해와 파괴의 희열감을 느끼고,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었지만 아내와의 문제는 그대로이다. 아내의 부모님은 딸의 보험료로 딸의 이름을 딴 장학재단을 만들고 싶어 한다. 데이비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것을 승인하는 서류에 사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사인을 하고, 장학금 수여식이 열린 날에 데이비스는 아내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임신을 하고 낙태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관계를 이루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새로운 것들은 발견되어 더해지고 과거의 것들은 새로운 의미를 띠고 더해진다. 데이비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관계를 계속해서 분해할수록 그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계속 발견된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관계는 복잡하며 관계와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그 모습도 무한하다. 분해의 행위가 문제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지고 때로 이 발견이 그 문제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그의 결혼생활도 계속 바뀌게 될지 모른다. 결국 이 세상에 없는 사람과의 관계를 분해하는 것은 무의미해지고 데이비스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기억하는 것뿐이다.
그녀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없지만 그녀와의 관계는 그에게 계속 영향을 줄지 모른다. 아니 줄 것이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데이비스 스스로에게도 그가 기억하고 싶은 모습으로 항상 기억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관계에 대해 그가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녀에 대해 무엇을 기억하고 살지 노력하는 것이다. 데이비스의 분해와 파괴의 과정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지 선택하는 여정이었다. 자신에게 의미가 있었던 관계와의 이별은 항상 슬프고 때로 파괴적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너무나 한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