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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석 Jul 28. 2016

여기 책임을 지려는 남자가 있다.

<로크> 스티븐 나이트, 2013

우리는 매 순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선택을 한다. 이 순간순간의 선택들이 이어져 하루가 되고 이 하루들이 이어져 삶이 된다. 과거의 경험은 때로 현재의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주며, 과거의 선택은 서서히, 때론 갑작스럽게 현재의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다. 여기 과거에 어떤 선택을 한 남자가 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런던으로 운전하고 있다.


한 남자가 차에 오른다. 신호가 바뀐 줄도 모르고 어떤 생각에 사로잡힌 듯 공간을 응시하던 그는 결심한 듯 가려던 방향의 반대로 핸들을 꺾는다. 그렇게 아이반 로크는 런던으로 출발한다. 코를 훌쩍거리지만 결연한 표정의 이 남자가 런던으로 가는 이유를 알기 위해 우리는 영화라는 문을 통해 그의 차에 동승한다.


영화는 다른 장면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아이반 로크라는 남자, 그가 몰고 가는 차 그리고 블루투스를 통해서 나누는 대화를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짐작할 수 밖에 없다.

아이반 로크, 그래서 그는 누구인가. 그는 평범하지만 비범한 사람이다. 그가 사랑하는 아내는 아직까지도 그를 "My love"라고 불러준다. 그의 두 아들은 아빠를 귀찮아 하기는 커녕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그는 그 스스로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분야에서 일하며 동료들이 신뢰하고 존경하는 콘크리트 업자이다. 그의 현재는 절대 번쩍번쩍 거리 지 않지만 그가 원하는 색으로 빛나고 있다. 현재 그는 행복을 가진 사람이다. 아니 '가졌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실수'를 저질렀다.('실수', 이것은 물론 아이반 로크가 선택한 단어일 뿐이다.) 그는 출장을 갔을 때 자신의 비서로 동행했던 베산과 관계를 가졌고 이것은 그녀의 임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그가 차를 몰고 런던으로 가는 이날, 그녀는 출산을 하려 한다. 지금은 그가 가족들과 축구경기를 보기로 한 저녁이기도 하고 그가 현장에서 책임지고 처리해야 할 최대의 콘크리트 작업을 앞둔 날이기도 하다. 아이반 로크가 런던 방향으로 핸들을 꺾었을 때 그는 두 다른 이유로 그를 꼭 필요로 하는 두 장소에 가지 않기로 선택한다.


나는 걱정한다. 최악의 경우 그는 아내와 아들들 그리고 직장 모두를 잃게 될 것이다. 아이반 로크 또한 걱정하겠지만 그는 그 걱정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데로, 옳은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면 다 잘 해결될 거라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그의 문제 속에 얽힌 다른 개인들이 이성적으로(아이반의 기준에서) 그에게 '협조'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이 일자리를 잃더라도 이 작업만은 책임지고 끝낼 수 있다고 믿으며 그의 아내도 결국에는 그를 이해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는 아마 각각의 대화에 대한 시나리오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사람들의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블루투스를 통해서만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던 아이반 로크가 아무도 타지 않은 뒷좌석을 백미러를 통해 응시한다. 그리곤 '그'에게 말을 건다. 우리는 기존까지 운전->전화->대화->운전으로 이어지던 구조에서 벗어난 이 일방적 대화를 통해 아이반 로크가 왜 저렇게도 굳건한 마음을 가지고 런던으로 향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아이반이 어렸을 때도 그에게 없었고, 지금 뒷좌석에도 없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강제적으로 겪게 만든 경험이 지금 로크의 선택을 만들었다.


그가 생각한 방향대로 모든 것이 흘러가진 않았다. 콘크리트 작업은 잘 해결될지 모르지만 그는 직장을 잃었고 그의 아내는 그에게 돌아오지 말라는 최후통첩을 하였다. 아이반 로크가 끔찍하게 아끼는 두 세계가 그의 현재의 선택에 의해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가 '알맞은' 선택을 한 것일까. 나중에 이 과거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게 되진 않을까. 아마 찰나의 후회는 있을지 모르지만 아이반 로크는 이 선택이 그에게 '불가피함' 이었음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현재의 상황을 만든 과거의 선택, 현재의 선택을 하게 만든 과거의 경험. 이 과거의 경험을 그의 손으로 누군가에게 다시 한 번 겪에 할 수 는 없었음을 그는 알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한 남자, 그가 운전하는 차 그리고 그가 블루투스를 통해 나누는 대화를 보여줄 뿐이다. 도로 위를 움직이는 차, 운전하는 아이반 로크의 모습, 그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이 별반 특별하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반복된다. 비슷한 장면들의 나열임에도 관객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군말하지 않고 동승할 수 있는 까닭은 영화 속 이야기가 가지는 힘에도 있지만 그 이야기를 역설적이게도 온몸으로 이야기해주는 배우 톰 하디에게 있다.(그의 몸은 영화 내내 운전석에 고정되어 있다.) 전화를 받기 전 작은 머뭇거림, 상황을 계속해서 곱씹고 결단하고 무너지는 두려움의 눈동자, 고함처럼 내뱉는 욕지거리부터 작은 훌쩍거림까지, 그는 아이반 로크로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여정에 함께하게 만든다. 그렇게 스티븐 나이트 감독과 톰 하디는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들과 다른 의미로 무모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영화를 '해냈다'.

마음을 다잡은 듯 결연했던 처음의 모습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표정의 남자가 운전을 하고 있다. 그리고 베산에게서 전화가 온다. 아이반이 차를 멈춘다.


"아이반?"

"괜찮나요?"

"들어봐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이반이 가만히 그 소리를 듣는다.


"아이반, 와줄래요?"

"그럼요"


차가 출발한다.


여기 과거의 선택을 책임지려는 한 남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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