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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석 Jul 13. 2016

썸머와의 500일

<500일의 썸머> 마크 웹, 2009

*이 글은 인간관계에서 남을 속이고 이용해 먹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글이 아님을 밝힙니다.


예전에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500일의 썸머에 대한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으레 그렇듯 영화 속 캐릭터들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썸머(주이 디샤넬 역)에 대한 주 의견은 그녀가 정말 나쁜 X이라는 것이었다. 그 주장에 근거는 그녀가 톰(조셉 고든 레빈 역)과의 관계를 즐기다가 결국 떠났으며 금방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것이었고, 그녀의 행동이 그들에게는 즐길 남자와 결혼할 남자 따로 있다는 언어로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주로 남성들끼리의 대화에서 즐길 여성과 결혼할 여성이 따로 있다는 얘기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얘기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들의 주장과 근거에 완전히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그때 당시 영화를 보고 관계에 있어서 썸머의 태도가 톰을 헷갈리게 할 만했고 사랑과 진정한 관계에 대한 불신을 항상 피력하던 썸머의 결혼은 나에게도 충격적으로 다가왔기에 톰과의 관계에서 분명 썸머가 잘못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러한 논란적인(?) 여주인공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500일의 썸머는 다른 많은 로맨스 영화들의 공식(매력적인 두 주인공이 서로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지만 이러저러한 조건들과 이유, 그리고 오해로 인하여 헤어졌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것이 반복되는)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 주로 톰의 시점에서 보이는 관계의 격동 과정을 표현한 방식, 그리고 음악(음악 자체도 좋지만 영화 속에서 어떻게 사용됐는지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왠지 계속 기억나는 영화였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에 이유로 기억에 남았던 영화였는지 영화는 이번에 재개봉하게 되었고 다시 한 번 큰 스크린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영화를 다시 보며 내 안에서 고개를 든 질문이 있었다. '과연 썸머가 톰을 헷갈리게 했나?' 이 질문은 예전에는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장면에서 드러났다. 썸머가 톰에게 이별을 통보한 후 톰은 친구의 소개로 소개팅에 나가게 된다. 소개팅 상대 여성인 비키가 해나가는 말을 세상에서 가장 무심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톰은 급기야 그녀에게 썸머가 그를 배신한 상황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는다. 톰은 썸머가 온 우주에서 그를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아직도 믿는다는 말과 함께 그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썸머는 사악하고 감정도 없는 불쌍한 인간이거나 로봇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톰의 찡찡거림을 엄청난 인내심으로(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이 마음에 들었거나 아주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듣던 비키가 질문을 한다.


"썸머가 바람피운 적 있나요?"

"아뇨, 전혀요"

"그녀가 당신을 어떤 식으로든 이용해 먹은 적 있나요?"

"아뇨"

"그리고 그녀가 처음부터 남자친구, 여자친구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고요?"

"음.. 네"


그리고는 비키는 '이제 알겠지?'라고 해석될 만한 희미한 미소를 짓지만, 이미 알콜에 이성을 담가 버린 우리의 톰은 마침내 떠날 수밖에 없었던 비키에게 추태를 부리며 "그래요 떠나요. 어차피 시간낭비였어 썸머랑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어가지고"라는 뜨악스러운 말을 남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 맺음 안에는 여러 가지 암묵적 규칙이 존재한다. 연인으로서의 발전 가능성이 존재하는 관계에서 이 규칙들은 보통 '썸'이라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기능하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위해주는 이상적 연인관계라 할 수 있는 마지막 '목적지'로 나아가게 한다. 규칙들은 대게 비언어적 표현들이다. 상대방의 작은 행동으로, 무엇을 했을 때 혹은 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 표현을 토대로 상대방의 의중을 짐작한다. 이러한 규칙들은 드라마나 영화, 연애 관련된 글 속에서 빠지지 않고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이다. 때로 표현을 잘 못하거나 잘못 받아들여 저서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기도 하지만 많은 매체, 그리고 현실 사회에서는 이러한 오해 과정도 마지막 단계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그릴 때가 많다. 결국 이상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헤쳐 나가야만 하는 시련의 과정으로.


이 규칙에 부합하여 톰과 썸머의 관계를 봤을 때 썸머는 분명 이해할 수 없는 애인이다. 톰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그들의 관계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연인으로서 발전하는 모든 규칙들을 지나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사실에서의 키스를 시작으로 썸머의 집에서 그녀의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들으며 톰이 그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될 때까지. 그들은 또한 시련의 과정도 거친다. 그 갈등 후 그에게 미안하다며 썸머가 찾아와 톰에게 키스했을 때 톰은 확신했을 것이다. 그들도 이제 마지막 단계에 충분히 도착했음을 말이다. 물론 썸머가 처음부터 연인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다.


물론 썸머는 그런 말을 정확히 저 문장 그대로 했다. 톰은 이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축적된 그들의 경험들과 그녀의 비언어적 표현들을 종합하여 스스로 이상적 연인이라는 마지막 단계 속에 그들의 관계를 집어넣은 것이다. 이런 톰에게 그녀가 이제는 친구로서만 지내고 싶다고 얘기했을 때 톰이 그녀를 로봇으로 생각했을 만하다.


썸머와 톰 두 사람의 관계 속 진정으로 진실되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이 질문은 누가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했냐는 질문이 아니다. 누가 원하는 관계에 대해 더 솔직했냐는 질문이다. 썸머는 톰과 로맨틱하게 정기적으로 만나게 되기 시작했던 때부터 톰에게 자신은 연인 관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그 순간 톰은 아마 썸머를 더 만나고 싶은 마음에, 그에게 그녀는 '운명'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이해한다'는 말로 관계로 계속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그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관계에 뛰어든 것은 톰이다. 썸머에게 연인으로서의 이별 통보를 받은 후 직장동료의 결혼식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됐을 때, 그리고 결혼식장에서 그녀와 함께 춤을 추게 되었을 때, 톰은 다시 '운명'의 힘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썸머에게 초대받은 파티에서 모든 것이 그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고 결국 썸머의 약혼반지를 보았을 때 그는 그자리에 도저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썸머는 결혼을 하게 되고 톰은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 와중 그들은 톰이 좋아하는 벤치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다. 톰은 그녀에게 묻는다.


"그때 이미 다른 사람이랑 사귀고 있었는데 나랑 왜 춤 춘거야?"

썸머는 짧은 침묵 뒤에 대답한다.

"그러고 싶었으니까"


톰은 어이없어한다. 분명 톰은 그 행동을 어떠한 마음의 표현으로 생각했을 텐데 그녀의 대답은 그저 그녀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니. 그리고 썸머가 그에게 사랑에 대한 톰의 말이 맞았다며, 지금의 남편과 그 감정을 알았다고 고백했을 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할 말을 잃은 톰의 손을 썸머가 한번 꽉 잡는다. 그리고 톰은 깨닫는다. 방금 전 썸머의 고백이 없었더라면 톰은 그 행위를 또 하나의 비언어적 표현으로 해석했을 것임을. 그리고 썸머는 그와 관계에서 그녀가 원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얘기했다는 것을. 그녀는 하고 싶은 것들을 했다는 것을. 관계에서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얘기하지 않았던 것은 본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는 몇 번이고 저주했을 그녀에게 진심으로 행복을 빌어준다.


사람 사이에 만들어지는 관계는 어렵다.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고 어느 날 그중 몇 사람들은 만나서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 관계가 1 대 1의 관계일 때, 자연스럽게 그 관계를 바라보는 2개의 시선이 생긴다. 그 두 시선이 같은 곳을 바라보면 우리는 그것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때로 너무나 암묵적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봐주길 바라고 있지는 않나. 너무나 잘 짜인 대본처럼, 대가가 작성한 빈틈없는 사랑의 이야기처럼. 온 우주가 도움을 주는 듯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하나로 나아가는 관계를 상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관계에 용기를 가지고 표현에 임하는 것이 아닐까. 설사 그 표현이 서로의 다름을 지적하여 관계가 끝날 수 있는 위기를 초래한다 하더라도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얘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자기의 표현에 책임을 지고 더 이상 누군가가 누구를 탓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마지막에 목소리 좋은 아저씨가 말하듯이, 톰은 이 모든 것이 결국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연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톰의 머릿속에서 집착처럼, 하루하루가 기억으로 응축되어있던 500일이 마침내 또 다른 새로운 하루로 바뀌게 되었을 때는, 그가 새롭게 마주한 또 하나의 우연 속에서 용기를 내었을 때이다. 그가 새롭게 만들게 될 관계가 500일보다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고 하루 만에 끝날 수 도 있으며 아주 다른 형태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톰은 썸머와의 500일을 통해 깨달은 듯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용기를 가지고 진실 되게 그 관계에 임하느냐라고. 우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용기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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