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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란 Nov 22. 2024

주름 / 이대흠 시인

    주름   /   이대흠



    아침 일찍 일어나 빗소리 듣는 것은

    햇차 한잔 쪼르릉 따를 때처럼 귀 맑은 것이어서

    음악을 끄고 앉아 빗소리 듣노라면

    웅덩이에 새겨지는 동그란 파문들이 모이고 모여서

    주름을 이루는 것이 보이네

    

    휘어지며 늘어나는 물의 주름을 보며

    삶이 고달파 울 일 있다면 그 울음은

    끄덕이며 끄덕이며 생기는

    저 물낯의 주름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네


    도닥도닥 번지는 물의 주름처럼

    밀물 썰물 들고 나는 뻘의 주름이나

    늙은 어미들의 그 주름살이나


    시간을 접어 겹을 만든 것들은,

    더 받아들이려 표피를 늘인 것들은,

    받아들인 아픔이 층을 이룬 것이어서

    




(주)창비

창비시선 311

이대흠 시집『귀가 서럽다』2010

58쪽






나는 그래


시름을 앓고 또 잃고 나면 남는 게 주름이다.
숱한 마음고생이 내게 티를 내고자 만든 흔적.

멀쩡한 책장 하나가 없어서
늘 쌓이는 근심을 보기 좋게 전시할 수도 
읽기 편하게 정리할 수도 없는
적막뿐인 호수에 무차별적으로 낙하하는 
깊은, 물의 길.

할 수 있는 대처라고는 
떨어짐을 가만히 인식하는 일, 받아내는 일.
내게 그어지는 선들을 보며 

아, 내게도 드디어 그녀의 선들이 와닿는구나.

우린 이렇게 더 가까워지는구나 안도하며
얼마나 더 친밀하고 더 애틋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어떤 일이 일어나도 
계속 닮아가는 주름은 바꿀 수 없다는 확신과 함께 
그녀가 쌓은 아픔의 층위를 가늠하며 
내게도 올 무자비한 무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다, 다짐하며

같아짐이 아닌 닮아감을 기뻐하며
눈물도 아픔도 그녀처럼 단단히 쌓아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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