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성, 2010,『타일의 모든 것』
어떤 통로 속으로 숨어든 길을 알지. 당신의 취향은 모르지만, 통로에 대해서라면 나는 모르는 게 없지. 거기 누가 있나요, 고양이처럼 가느다란 수염을 달고 나는 발끝으로만 걷는데 365일 셔터가 굳게 내려진 통로를 어슬렁거리는데
귓바퀴처럼 확장된 통로에 숨어든 당신의 혈통은 어디로 흐르거나 폭발하는가. 째깍째깍 파란 뇌관이 타들어가는데 기침을 할 땐 투명한 침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검은 두건을 쓴 혁명가들이 탄 열차 휙휙 지나가는데 어쩌면 불타는 꼬리를 아홉 개나 매달고
이봐요, 당신은 종일 열차가 지나가는 통로에 앉아 있군요. 하지만 그건 당신의 취향일 뿐. 나는 컴컴한 시멘트 정원에 물을 뿌리고 3분마다 열차는 빛을 뿌리고 그리고 당신의 얼굴이 밝았다가 다시 어두워진다.
귀머거리 바람이 안녕 속삭일 때의 여긴 재의 언더그라운드, 입구와 출구가 따로 없지. 시멘트 가루가 통로에 별빛처럼 쏟아진다. 머리카락에 속눈썹에 푸릇한 입술에 흰 재가 수북이 쌓이고, 나는 얌전히 두 귀를 접었다. 두꺼워진 시간의 벽을 손톱으로 긁으며 당신은 울음을 터뜨린다.
(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385
©이기성, 2010,『타일의 모든 것』
40-41쪽
나는 그래
내가 있는 곳에선 볕이 들지 않는다.
푸릇한 새싹보다는 얼기설기 엮인 덩굴이 대부분이고
덩굴은 아주 열심히 내가 터트린 울음을 머금은,
독한 어둠을 잇느라 정신없다.
어둡기만 한 곳은 아니다.
가끔 볕의 탈을 쓴 가짜 빛이 제멋대로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하며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를 '시멘트 정원'을, 가꾼다.
이따금 목이 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
어슬렁거리며 눈물을 흘려주곤 하는, 그런.
생각해 보니 그때쯤이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진짜 죽음에 대해
나는 어디서 넘어졌고
어디쯤 부러졌으며
또 어떻게 망가져 버렸는지에 대해.
'당신의 취향', 혹은 사사로운 결정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당신과는 다른 곳에 있다며 주장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고
또 이미 벌어진 아득한 현상이지 않냐고
당신도 아는 거지, 본인이 있는 곳에도 볕이 들지 않는다는 걸.
나도 부정하고 싶은 거다.
언더그라운드엔 나만 갇혀 있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