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녹색 / 이영광 시인

창비시선 318 / ©이영광, 2010,『아픈 천국』

by 우란

녹색 / 이영광



녹색은 핏방울처럼 돋아난다.

온 세상이 상처이다.


먼 들판에 시내에 눈 녹는 숲에

연록의 피가 흐른다.


당신 가슴이 당신을 찢고 나오려 하듯이

당신이 항거를 그치고

한덩이 심장이 되고 말듯이


녹색은 온 세상을 제 굳건한 자리에서

터질 듯 나타나게 한다.

온 세상이 다시 온 세상을 정신없이

찾아내게 한다.


녹색은 녹색이 죽은 땅을 지나 여기 왔고

폭설의 계엄령을 뚫고 여기 왔고

녹색이 죽은 땅을 선 채로 해방시키고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어디에도 없지만

당신의 아픈 대지를 흐르는 건

모두 새로 난 것들이다.





(주)창비

창비시선 318

©이영광, 2010,『아픈 천국』

52-53쪽


나는 그래


여전히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잃고, 잊고, 버리고, 파괴하는 일들에 붙는 이름도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한다.

인정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는 일

무엇이 나를 이렇게 푸르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나를 이토록 대항하게 이끌었는가

가슴에 돋은 싹 하나에, 한 달이 흐른다
아니, 한 달이란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그 덕에 성장 혹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엔
오늘도 피가 흐르고, 수없이 찢긴 기억을 가진 상흔엔
가장 좋아하는 색이 칠해진다.

이런, 믿음을 이용하기로 한다.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곳에 갇혀있지만
언제든 새롭게 꾸밀 수 있는 자생력이 있는

나란, '아픈 대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장화 같은 몸 / 이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