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318 / ©이영광, 2010,『아픈 천국』
녹색은 핏방울처럼 돋아난다.
온 세상이 상처이다.
먼 들판에 시내에 눈 녹는 숲에
연록의 피가 흐른다.
당신 가슴이 당신을 찢고 나오려 하듯이
당신이 항거를 그치고
한덩이 심장이 되고 말듯이
녹색은 온 세상을 제 굳건한 자리에서
터질 듯 나타나게 한다.
온 세상이 다시 온 세상을 정신없이
찾아내게 한다.
녹색은 녹색이 죽은 땅을 지나 여기 왔고
폭설의 계엄령을 뚫고 여기 왔고
녹색이 죽은 땅을 선 채로 해방시키고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어디에도 없지만
당신의 아픈 대지를 흐르는 건
모두 새로 난 것들이다.
(주)창비
창비시선 318
©이영광, 2010,『아픈 천국』
52-53쪽
나는 그래
여전히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잃고, 잊고, 버리고, 파괴하는 일들에 붙는 이름도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한다.
인정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는 일
무엇이 나를 이렇게 푸르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나를 이토록 대항하게 이끌었는가
가슴에 돋은 싹 하나에, 한 달이 흐른다
아니, 한 달이란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그 덕에 성장 혹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엔
오늘도 피가 흐르고, 수없이 찢긴 기억을 가진 상흔엔
가장 좋아하는 색이 칠해진다.
이런, 믿음을 이용하기로 한다.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곳에 갇혀있지만
언제든 새롭게 꾸밀 수 있는 자생력이 있는
나란, '아픈 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