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 시인선 409 / ©박성준, 2012,『몰아 쓴 일기』
유리는 땀을 흘리지 않고 욕조는 배수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물거품들이 가지는 연대감이랄까 하는 것들은
누군가 잘못 왔다 간 환영처럼 불쾌하고
구멍의 형태를 뿌리로 두고 있는 욕조 따위의 것들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나쁘다
우호적인 물거품들은 서로의 어깨에서 빌려온
순식간에 왔다 간 무지개를 품고
소거하고 나면, 청결을 요구하는 몸은 대체로 허구같다
아침이면 옷 입은 여자가 찾아와 옷을 갈아입고 가고
배수구에 머리칼을 엉켜놓고 간다
물과 섞이지 않는 것들은 욕조 아니라 구멍에, 뿌리를 남긴다
욕조는 생각한다
무지개 앞을 서성거리다 헤어지는 꿈
유리는 뿌리를 갖지 않고 거울은 바깥을 뿌리로 두고 있다
거울은 늘 타인이 필요하다, 나는 고로 타인이 필요 없다
타일의 속성은 욕조이거나 유리이거나 거울이나 늘 젖어 있어
내 중심을 잡고 있던 허리가 쿵
미끄러질 각오를 한다, 사랑했을까, 그럴 때도
무지개는 잠시 왔다가 갔을까
나는 아침이면 어재부터 흘린 땀을 씻는다
닦는다는 이유로 입으로도 거품을 물고 있다
바닥은 늘 미끄럽고, 욕조는 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물이 나를 감각하고, 고로 나는 감각이다
욕조는 뿌리가 없어서 있다
이사를 가도 들쳐 메고 갈 수 없는 오 나의 욕조여, 가지고 싶은 이름이여
제발 좀, 나약하게 있어라, 사랑했을까
(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409
©박성준, 2012,『몰아 쓴 일기』
142-143쪽
나는 그래
욕조 안은 매일 차갑고 뜨겁고를 반복한다
수증기가 가득 찰 땐 날 필요로 하는 거울을 보고
잠시 사라질 것들을 떠올리며 끝엔 꼭 미소를 짓는다
무슨 의미의 웃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치, 이미 씻긴 음울의 주인을 찾는 것과 같다
입가와 눈가를 덮쳤던 축축한 주름들이
꼭 엉킨 머리칼처럼 전시된다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나 역시 같은 신세가 된다
그 순간 가장 나약하고 가장 약삭빠른 자는 누구인가
욕조는 답을 알고
배수구도 답을 안다
해서 '바닥은 늘 미끄럽고'
'욕조는 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거울 역시 수증기에 의해 질식당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어떤 이에겐 완벽한 치유,
다른 이에겐 완벽한 덫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