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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 / 진은영 시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351 ©진은영, 2008,『우리는 매일매일』

by 우란

유년 시절 / 진은영



너무 높은 푸른 벽돌로 둘러싸인 시간

따듯한, 반짝이는 거짓말로 된 시간

겨울 태양은 붉은 벨벳 장갑으로

토끼의 언 귀를 어루만진다


목덜미를 따라 얼음이 미끄러진다

놀라서 너는 어른이 되고

안개 속을 더듬거리며 공책을 펼친다

짙은 잉크의 서툰 문장 위에 빗방울


사브레 과자와 딸기나무 침대로도

잠들지 않는 불행들이 가시 울타리에 걸려 있다

요통은 달빛 모르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너는 천천히 허리를 구부린다

부드러운 배 밑에는 차가운 물결


밤새 하얗게 패어가는 모래들과

낯선 해안으로 실려간다


잠 깨어 조개껍데기를 열면

떨리는 눈썹에 찔린 유년의 눈알들

깜짝 놀라 쳐다본다. 새빨개진 진주처럼




(주)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1

©진은영, 2008,『우리는 매일매일』

86-87쪽


나는 그래


작은 상자 안에 담기엔 너무나 큰 유년 시절이지만
사람들은 꼭 작은 상자 안에 유년 시절을 담는다.
추억이라 부르면서 기억하려고.

처음 날려봤던 연의 일부,
처음 쓴 일기장, 화질이 좋지 않아 얼굴도 보이지 않는 사진,
가족 여행으로 다녀온 동물원 입장권 표,
언제 주워 만들었는지 모르겠는 나뭇잎 책갈피.

한참 정신없이 좋은 기억을 골라 담다 보면,
어느 순간 좋은 기억만 담는 일이 종료되고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기억들이 밀려든다.

좋지 않았던 일들을 축약해 담는 과정
다신 보고 싶지 않지만, 희한하게도 버릴 수는 없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심리는
늘 함께 하고.

그 결과 작은 상자엔 수많은 작은 상자들이 쌓여있다.
정말로 '유년의 눈알들'이 숨어 있는 것처럼,
어쩔 땐 슬프고 섬뜩하다.
내가 넣지 않은 상자가 정체를 숨긴 채
날 하염없이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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