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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섬을 보다 / 문태준 시인

창비시선 238 ©문태준 2004『맨발』

by 우란

저녁에 섬을 보다 / 문태준



저녁에

물결의 혀를 빌려 조금씩 고운 모래톱을 바깥으로 밀어내놓은 작은 섬을 바라본다

외부에서 보는 섬은

새뜰로 가는 길에 있던 돌비석이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같기도 하고

뒷마당에서 시득시득 말라가다 천천히 무너져내리는 나뭇동 같기도 한데

저녁에

조금씩 바깥으로 흘려보내는 것들을 보는 일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주)창비

창비시선 238

©문태준 2004『맨발』

70쪽


나는 그래


나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날은 흔하지 않다
저녁을 마음껏 빌리는 일만큼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포기한 일과 버린 사람과 잃은 나를
'외부에서 보'는 일은 흔하디 흔하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섬'들에게도 이름이 있었겠지.
분명 내게 시도 때도 없이 불리던 귀중한 것들이었고
혼자가 되는 흔한 날엔 '섬'에서 섬들을 본다.

슬픈 일이 분명하지만 시곗바늘의 배려를 마음껏 누린다
가장 잘 볼 수 있는 날은 흔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나를 밀어내는 과정에서
나를 받아내는 과정으로
스스로를 지켜내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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