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11. 사이언스프리즘 세계일보/내 글]
韓·伊 심각한 코로나 상황 유사
가족·종교·동료 등 전염 매개체
사회적 관계 의미 되짚어볼 때
결속·규범·존중 ‘최적점’ 찾아야
이탈리아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하다. 오늘 현재 확진자는 1만명을 넘어섰고 사망자 수에서도 한국을 훨씬 넘어섰다. 게다가 사망자 다수는 기저질환이 있었던 노인들이라고 한다. 한국과 이탈리아 모두 비교적 우수한 의료시스템과 반도라는 지리적 입지가 비슷하며, 해외로부터 사람들의 유출입이 많다는 점도 유사하다. 심지어 인구도 6000만명 정도로 서로 닮았다. 한국과 이탈리아처럼 주요 도시의 인구밀도가 높고, 해외와의 교역과 관광객, 유학생 등 인적 교류가 많은 나라는 바이러스에 취약하다. 첨단 의술과 시설도 단기간에 급격히 불어나는 중증환자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현재 대구·경북의 상황이 그러한 한계를 잘 보여준다.
이번 바이러스는 독감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또는 덜 고통스러웠다고 말할 정도로 가벼운 증상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는 보도다. 그러다보니 증상을 무시하고 수일간 일상을 계속하는 경우가 있고, 그 기간이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래서 당국은 증상 발현 후 나다니지 말고 즉시 집 안에 머물며 상태를 지켜보라고 권장하고 있다. 운 나쁘게도 피전파자가 노약자라면, 심지어 기저질환이 있는 노약자라면 치명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이 질환의 심각성이 있어 보인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사회관계를 따라 흐른다. 안타깝게도, 가족과 종교기관, 친구, 이웃, 직장동료가 바로 전염의 주된 매개체가 되고 있다. 함께 대중교통을 이용한 이름 모를 사람들도 분명 나에게 바이러스를 옮길 수는 있지만, 대화를 통해 서로의 침방울을 공중에 날려 보낼 정도로 긴밀한 관계는 아니기에 그만큼 상대적 확률도 낮다.
치명적 바이러스에 대항해서 우리는 발버둥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캠페인을 통해 바이러스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다니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고자 한다. 대학은 개강을 연기하고 학교당 수천개의 강의를 온라인으로 전환했다. PC 앞에 앉아 눈앞에 학생들이 있다고 상상하고 강의하는 게 낯설게 느껴지는 많은 교수들과, 중고등학교 때 열심히 들었던 ‘인강’(인터넷강의)보다 훨씬 세련되지 못한 대학 온라인 강의에 조금 실망하면서도 새로운 형식에 적응하느라 고생하고 있는 학생들은 후일 이 국면을 어떻게 회상하게 될까. 비록 그 방향을 알기는 어렵지만, 코로나로 인한 전 대학의 강의모드 집단전환은 대학이라는 교육기관에 새로운 변화의 단초가 될 것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가 의지하고 사는 많은 사회적 관계들에 대해 다시 그 의미를 되짚어볼 때가 왔다. 대학교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university는 universitas 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본래는 ‘배우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교육과 연구라는 대학의 본령을 완전히 온라인으로 옮기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강의실에 빽빽이 앉아있는 학생들이 판에 박힌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방식의 종말을 우리는 지금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리적 공존과 사이버공간의 유대를 조화시키는 일이 바로 대학의 새로운 도전이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종교를 의미하는 religion이라는 영어단어는 결속(bind), 존경(reverence), 그리고 의무 또는 복종(obligation)을 의미하는 라틴어 religar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종교의 기존 의미에 한정되지 말고 가족, 친구, 동료, 종교와의 결속(bind)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거리라는 새로운 규범을 지키며(obligation), 본인이 믿는 종교뿐만 아니라 국가나 사회라는 공동체에 대한 존중(reverence)을 모두 만족시키는 최적점을 찾는 지혜가 요구되는 건 아닐까.
필자가 수년 전 연구를 마친 미발표 논문은 청소년의 일탈행위가 가족, 이웃, 학교와 맺는 관계의 질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결과를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 청소년 본인의 결단도 매우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바이러스의 확산이라는 새로운 도전 역시 우리가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와 스스로를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개인의 양식에 두루 기대고 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