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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Mar 24. 2024

수목원, 서식지를 재현하다

한눈팔지 않고 솟구쳐 자라는 나무를 보다

수목원(樹木園)은 여러 종의 나무를 관찰하고 연구하기 위해 서식지를 재현하고 기르면서 동시에 일반에게 공개하는 장소이다. 젊었을 때는 꽤 높은 산도 올라가 본 경험이 있고, 등산이 주는 심리적 만족이 적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산의 정상에 오르는 극적 성취감보다 둘레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심심한' 과정을 더 즐긴다. 아마도 내려올 때 무릎에 걸리는 하중을 느끼면서부터일 거라고 생각한다.

둘레길로는 완주하지 못한 제주 올레길, 아주 일부분만 걸었던 지리산, 북한산 둘레길을 걸어 보았고, 두 시간이면 완주가 가능하여 자주 가는 심학산 둘레길, 안산 자락길 등이 좋다. 겨울에 갔었던 서울대공원 둘레길도 나쁘지 않았다. 수목원 중에는 제주 치유의 숲과 비자림, 유명산, 안면도, 화담숲 등이 좋았다. 엊그제 다녀온 국립수목원도 갈 때마다 다른 느낌이다. 
 

육림호, 국립수목원


정문으로 들어가 숲생태순환로를 걷다 보면 작은 호수가 하나 나온다. 수면이 잔잔하여 주변 풍경을 그대 로 비춘다. 호수 둘레를 따라 걷다가 카페에 들러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다. 창밖으로 보는 호수 풍경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브라우니와 치즈 머핀을 곁들여 차를 한 잔 마시면 저절로 떠오르는 사람이 무라카미미 하루키다. 보통의 소설가가 차 마시는 장면을 묘사할 때 '비스킷과 함께 커피를 마셨다' 정도라면 하루키는 매우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어떤 바닥과 벽지가 있는 방에서, 케이블과 의자의 모양도 설명하고, 어떤 문양의 옷을 입은 사람이 구체적인 이름의 빵과 차를 몇 번에 나누어 마시는가를 묘사한다. 이번에 읽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도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는데, 읽다 보면 입안에서 그 맛이 느껴지는 정도라고나 할까. 하여튼, 이 통나무 카페의 큰 창을 통해 호수의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면서 뜨거운 차를 천천히 마시고 나왔다는 이야기다. 


그다음은 전나무 숲길이 나오는데 국립수목원의 여러 테마 중 가장 좋은 곳이라 생각한다. 어딜 가나 '아 좋다'라는 감탄사가 나오는 곳이 있는데 가령 제주 치유의 숲에선 삼나무, 비자림에서는 비자나무, 서오릉의 서어나무, 금강산의 소나무, 안산자락길의 메타세쿼이아가 있다면 월정사와 이곳 국립수목원에서는 전나무 숲이 좋다. 


국립수목원 전나무 숲길


한눈팔지 않고 솟구쳐 자라는 전나무 


전나무를 '한눈팔지 않고 솟구쳐 자라는 나무'라고도 하는데, 적절한 표현이다. 대개의 나무가 햇빛을 좋아하는 '양수'인 데 비해 '음수'인 전나무는 그늘진 곳으로 가지를 뻗는다. 그래서인지 가지를 뻗을 곳이 없는 공간에서 자라는 전나무일수록 옆쪽보다 위쪽으로만 자라는 방향성을 보인다. 줄지어 심어놓으면 거대한 높이의 침엽수 길을 만든다. 내소사, 월정사, 이곳 국립수목원의 전나무 숲길이 그렇게 탄생했다. 

꽤 오래전에 오대산 월정사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때도 전나무 숲길이 장관이었다. 이곳 국립수목원의 전나무는 월정사의 전나무 종자를 증식해 1927년경 경기도 포천에 심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육림호를 지나면서 조성한 이 숲길은 약 200m 구간으로, 국립수목원의 특별한 볼거리다. 산림조합중앙회의 문화홍보실에서 전하는 전나무의 교훈을 들어보자.


전나무는 가지가 잘 부러지는 편이다. 뿌리가 얕아서 폭풍우가 지나가면 뿌리째 뽑히는 일도 잦다. 키를 높일 줄 만 알았지 조직을 치밀하게 만들지 않고 뿌리를 땅속 깊이 서려 두지 못한 결과다. 그래서 조금은 흉물스러운 말년을 맞이하는 나무가 전나무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겉보다 내실을 기하는 사람에게 좋은 말년이 온다. 


마지막 문장은 없어도 될, 그야말로 꼰대 같은 교훈이다.^^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산림 보호를 위해 길을 막아 놓았다. 오른쪽으로 돌아 아열대식물원과 박물관까지 보고 내려왔다. 점심으로는 더덕제육정식을 먹었는데 입이 짧은 나를 위해 준비한 음식 같은 자연밥상이었다. 더덕과 제육을 적당한 양념과 섞어 볶은 것을 싱싱한 상추쌈에 싸서 입안 가득히 넣고 우적우적 씹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적당히 익은 파김치나 고사리, 도라지, 가지무침과 된장찌개를 곁들여 밥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실존감, 이거 무엇? 
 

점신 한 끼


3월 초에 심학산 둘레길을 걸을 때, 내친김에 정상에 올라가 보았다. 해발 194m의 야트막한 산이라 정상이랄 것도 없다. 그러나 역시 내려올 때 무릎에 살짝살짝 통증을 느꼈다. 그래서 생각하길, '역시 심학산은 둘레길이 제맛이야'라고 했었는데, 지난해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를 갔을 때도 그랬다. 578 계단을 올라 후덜 거리는 다리로 출렁다리를 건너는데 고소공포증이 엄습했던 기억이 있다. 그곳에서도 장시간 계단을 오르내리는 바람에 회복에 긴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결론은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것보다 그저 평탄하게 걷는 것이 나에게는 맞다. 다음달 초에 경북 군위에 있는 '사유원'을 예약했다. 앞으로 좋은 수목이 있는 곳을  몇 군데 더 찾으려 한다. 

  



* 내용 중 일부는 산림조합중앙회 문화홍보실의 자료를 참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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