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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회문화

'법대로'의 의미를 생각하며

이 경험이 민주주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함

by 교실밖

법에는 국가의 강제력이 따라붙는다. 이 단순한 명제가 법치주의 국가에 사는 다양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의 질서를 유지한다. 국가가 법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은 상식이다(법, 국가 동일성의 이론). 국가의 모든 행정은 법률에 의하고(행정의 합법률성 원칙), 기본권을 제한할 때는 법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기본권 제한의 법률 유보). 아울러 행정명령은 법률에 근거해서만 만들어지며 그 법률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에 있어서만 효력을 가질 수 있다(법률 우위의 원칙).


"법에도 눈물의 있지 않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다. 당연히 법관이 선고할 때 벌을 받게 될 대상자의 사정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법관은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그 기준 범위 안에서 양형을 매긴다. 법관에 따라 너무 차이가 발생하지 않도록 양형기준표를 둔다. 물론 서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가진 당사자들이 법적 절차와 결과에 승복한다는 대전제가 있다. 공적 절차와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때조차도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이의를 청구하는 '법적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공적 절차가 최종 종료되었을 때까지 무죄를 입증하지 못했다면 역시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상응하는 죗값을 치러야 한다.


예를 들기도 피곤하지만,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과정에서 피청구인 측 최후변론과 윤석열의 최후진술이라는 것을 들어보면 도무지 이 사람들이 평생을 법으로 밥벌이를 한 전문가들인가 하는 의심이 들게 한다. 조금이라도 자기들에게 유리한 판단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행한 행위가 헌법과 법률 어느 조항에 비추어 위법하지 않았다'라고 주장을 해야 하는데 계속 지지자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방법도 있긴 하다. 정당방위는 자기 혹은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행한 가해 행위이다. 이 경우 법은 그 방어의 행위가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 침해를 방어하기 위한 행위로써 상당한 이유를 가질 때만 인정한다. 바꾸어 말하면 상당한 이유를 객관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면 성립되지 않는다. 물론 그 역시 법에 정하는 바에 따라야 한다.


당연히 판단 과정에서 특정 행위의 정당함을 다툴 수 있다. 이 또한 법이 정한 절차에 따른다. 한쪽은 헌법 또는 법률 몇 조, 몇 항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는 데, 한쪽은 법 이외의 사항을 계속 들이댄다면? 예컨대 행위의 불가피성, 피의자가 느꼈을 심리 정서의 문제를 말하는 경우인데, 이는 "처벌은 수용하겠으니 형량을 좀 깎아 주세요"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헌법 재판의 과정에서 생긴 기록이 형사재판에서 근거로 쓰일 것을 고려하여 주장을 누적하는 방식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주장의 결과로 탄핵이 인용되면 동시에 주장의 정당성도 상실되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진영 내에 호소하는 방법과 대국민 호소 방법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지금 일단의 여당 의원들이 극우세력의 주장에 동조하고, 탄핵소추를 기각해 달라는 탄원을 하는데... 이는 자기 발목을 잡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당장은 거리에 나오는 세력들에게 어필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머지않아 그것을 부정해야 할 시간이 오기 때문이다. 그때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후일을 도모한다고? 하필 극우의 주장에 자기의 포지션을 맞춘다? 어리석은 일이다.


작년 12월 초에 시작된 어수선함이 3월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민들의 모든 일상이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이 경험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다지는 계기가 될 지, 우리 사회 지형의 전반적 우클릭을 확인하고, 현존하는 세력으로 인정하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 될 지 궁금하다. 전망이 그리 밝지 않아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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