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포화의 시대
"요즘 뉴스가 너무 많이 쏟아졌잖아요. 몇 달 동안 정말 제 할 일도 잘 못할 정도로 보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이러다 정말 안 되겠더라고요. 결국 뉴스를 아예 끊어버렸어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듣고 이 단어가 생각났다. '번아웃(burn-out) 증후군'. 엄청난 양의 과업에 시달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몇 년 전 많은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반영하며 등장한 용어였는데, 지금은 이 증후군이 꼭 어떤 '일'에만 해당되지는 않는 것 같다. 정말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 과거 정보화 시대라는 수식어가 한창일 적엔 이런 묘사가 적당히만 와 닿았고, 심지어는 식상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런데 이제 피부 깊숙이 체감하고 있어 식상하다고 말하기가 미안할 정도다. 뉴스의 포화가 요즘 유독 심하게 느껴지는 것이 단지 지금 우리의 사회적 상황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다. 나의 곁을 항상 지키고 있는, 지금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주요한 도구인 스마트폰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스마트폰은 복잡다단한 뉴스들과 얘깃거리를 매일 매시간 나의 눈앞에 배달하는 현재의 환경, 그 중심이다.
# '가치 있는 뉴스'의 별난 기준
뉴스를 생산하는 통로가 셀 수 없이 많아졌다. 메인 신문사나 방송사는 뉴스 생산의 주도권을 빼앗긴 지 오래다. 이름이 생소한 인터넷 언론사도 자극적인 제목을 내세워 포털의 메인에 걸리고 엄청난 뷰어를 얻을 수 있다. 정식으로 등록 안 된 신문사는 솔깃한 글을 작성해 모바일 메신저에 띄운다. 가짜 출처를 단 소식이 빠른 속도로 퍼지고 일부에겐 막연한 권위(믿음)도 얻는다. 너무 많은 주체들이 손쉽게 뉴스를 작성하게 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더 중요한 뉴스인지 판별할 수가 없다. 뉴스들은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며 난립하는 한편 '진짜 뉴스' '가짜 뉴스'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들린다. 사뭇 심각할 정도로 혼란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포지션은 두 가지다. 더 깊은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지거나, 오로지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거나.
지금 시대를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공유'일 것이다. 공유가 가치를 만들고 증폭시키는 힘은 엄청나다. 수많은 뉴스 중에서 가치를 얻는 뉴스 역시 많은 이들에게 공유되는 뉴스다. '가치=공유'라는 등식 아래 어느덧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거나 중요했더라도 이내 가려진다. 애초부터 뉴스 생산자들의 관심은 사람들이 널리 퍼뜨리고 싶어 할 만한 뉴스인지의 여부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이런 거 다 믿을 수 없어'라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그러나 그 뉴스를 접한 순간 나도 모르게 의식 깊숙이 새겨진 프레임이나, 정보가 남기고 간 잔상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혹은 진실 여부가 의심되더라도 만약 내가 믿고 싶은 내용이라면? 신뢰할 만한 기준이 무너진 상황에서 의지할 만한 건 내 신념뿐일 수도 있다. 지금 세상에서 가치를 부여하는 주체는 더 이상 권위 있는 누군가가 아닌 바로 개별적인 '나'이지 않은가.
# 반투명의 가림막이 가능할까
쏟아지는 뉴스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개인화, 맞춤형 뉴스 서비스라 한다. 맞춤형 서비스는 유행처럼, 당연한 순리처럼 널리 퍼지고 있다. 개인의 취향에 맞는 정보를 제공하는 알로리즘은 정교해지고 있고, 각종 포털과 앱의 인터페이스 역시 최적화된 개인화 서비스를 위해 거듭 업데이트되고 있다. 그런데 방대한 뉴스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도 있지만, 헤매고 헤매다가 저 누군가처럼 완전히 번아웃 되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의 고민은 조금 결이 다를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몰려드는 이야기들로부터 잠시 피해있을 자유를 요구한다. 생각해보면 참 쉽지 않다. 스마트폰을 쥐고 살아가는 한, 카톡 단체방에서 지인들이 이런저런 기사들을 퍼 나르는 한, 무언가를 검색하기 위해 포털에 들어가는 한, 정보의 들이닥침으로부터 눈과 귀를 막을 방법이 없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스마트폰이 만들어주는 환경 안에서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그 도피처 또한 기술의 미래 모습에서 찾게 될는지도 모른다. 내 둘레에 정보로부터 가림막을 쳐줄 어떤 기술을 상상해본다. 이러한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있다면 등장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무언가 빠르게 변화하는 흐름에는 늘 반동의 움직임이 있기 마련이니까. 다만 그 기술을 구체화하기 앞서 잊지 않아야 할 점은 정보에 지친 사람들도 대부분 완전한(영원한) 단절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잠시 잠깐의 휴식을 원할 수도 있고 (반) 투명의 가림막을 요구할 수도 있다. 핵심은 '너무 많이 쏟아진다'는 점, 그리고 사람의 본성은 정보의 포화를 마냥 반기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과연 조율은 가능할까.
우리는 더 나아진 삶을 위해 기술을 발전시킨다.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이 늘 모든 사람들에게 플러스가 되지는 않다는 진리를 안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는' 방향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현재의 삶이 마냥 기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묵인하지 않는 데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