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따비 Apr 02. 2017

17. 네모의 꿈

네모난 화면, 네모난 세상

어릴 적에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노래가 있다.

오랜만에 생각이 났다.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 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네모난 조간신문 본 뒤

네모난 책가방에 네모난 책들을 넣고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건물 지나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네모난 오디오 네모난 컴퓨터 TV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한 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걸

- W.H.I.T.E, '네모의 꿈'



둥글게 살라면서 네모난 것뿐인 아이러니를 우리의 '의식 바깥으로' 이끌어준 이 노래. 작사가가 이 재미난 발상을 한 것은 1996년이다. 그리고 20년 후 우리는, 여전히 네모의 꿈을 꾸고 있다.


네모난 스마트폰

네모난 화면

그 속에 담긴 네모난 세상.



네모난 스마트폰 속에 네모난 사진, 네모난 채팅창, 네모난 영상, 네모난 메모장, 네모난 카드 뉴스가 가득하다. 그리고 그릇을 따라 그 속에 있는 건 네모난 이야기, 네모난 추억, 네모난 대화, 네모난 움직임, 네모난 소식, 네모난 정보들이다. 스마트폰으로 이야기하고 스마트폰으로 세상만사를 접하면서 네모난 이미지 한 장과 네모난 플레이어 한 클립에 글, 그림, 영상이 담긴다. 스마트폰의 화면은 왜 애초부터 네모나게 디자인되었을까? 네모난 화면 안에 동그란 카드 뉴스를 제공하면 이상할까? 포스트잇에도 별 모양, 하트 모양, 토끼 모양이 있는데 스마트폰의 온갖 메모 앱들은 왜 하나 같이 네모날까? 엉뚱한 질문들이 꼬리를 잇는다. 


네모난 카드 안에 세상이 갇히고 있다. 갇힌다는 표현은 너무 부정적일까. 네모난 그릇 안에 세상이 네모나게 담긴다. 우리의 시야도 네모나게 된다. 네모 한 장에 하고 싶은 얘기를 담으려고 하다 보니 차마 다 못 넣는 맥락들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가뿐히 생략된다. 다들 간결하고 깔끔한 '네모'로 말하고 듣고 싶어 하니까. 만약 동그라미, 별 모양에 담겼다면 다르게 들리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명확한 경계선이 없는 그릇일 때 더 풍성해졌을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런 가능성은 아무도 꾀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네모난 시각과 생각의 틀이 당연하다. 우리가 정말 네모난 세상을 좋아해서 일까? 네모난 세상이 최선일지도 확신하기 어려운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네모의 꿈'은 이렇게 노래하며 끝맺는다. 우리는 스마트폰의 속의 '네모난 세상'이 당연하게 느껴지고 있지만 동그란 폰의 가능성은 너무 쉽게 잊고 산다. 스마트폰이라는 디바이스가 만들어준 창틀일 뿐. 바보같은 질문이라고 가볍게 넘어가버리기엔 스마트폰에 의존하여 인지하는 게 너무 많다. 오늘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어떤 것이, 혹시 세상을 네모나게 바라본 바람에 익숙하게 규정되었던 건 아닐지. 무엇이든 낯익은 걸 낯설게 바라보는 데서 드러나는 법이니까.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96년의 이 노랫말이 지금 가장 적시적소의 의심일지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16. 'MY피드'를 옮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