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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식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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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엉 Dec 22. 2020

와인 한 잔

 

 2020년은 대단한 해다. 돈을 열심히 벌지도 않는데, 쓸 데가 없었다. 주식을 시작했다. 그런 데로 수익이 났다. '주식 한다'는 사람들이 보면 코웃음 칠 돈이지만, 설탕 몇 포대쯤은 가볍게 살 만한 돈이다. 달콤했다. 뭉친 돈은 어디론가 튀어 나간다. 하늘길이 막혀도 물류는 막히지 않았다. 내게는 와인이었다.


 수제 맥주에 빠졌을 때 곧 파산하겠다고 생각했다. 한 뼘짜리 병이 오천 원도 넘는다니. 어떤 병은 만 원이 넘었다. 미쳤다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기묘한 2020년이 되기 직전 작년 크리스마스의 어느 날이었다. 한 치 앞도 몰랐던 거다. 큰맘 먹고 계획했던 두 개의 여행은 모두 어그러졌다. 일도 애매해졌다. 집에만 있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니. 욕 같은 칭찬이었다. 


 시간이 많아지니 곧 입이 심심해졌다. 설탕물 따위로는 혓바닥이 반응도 하지 않는다. 와인이나 마실까 봐. 마트의 와인 코너를 뒤적였다. 이거 괜찮겠네 하고 집어 든집어든 와인이 아주 괜찮았다. 뭐야, 이 정도면 와인도 먹을 만하겠는데. 평소보다 비싼 삼만 원 짜리 와인을 집어 들었다. 마투아 와이너리의 피노 누아였다. 


'Matua Wine maker's release Pinot Noir.'  


빨간 머리 앤이 친구인 다이앤과 함께 딸기술을 마시는 장면이 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달콤해 보이는지, 소주에 딸기를 짓이겨 넣고 나서야 만족하는 나였다. 냄새는 고약하고, 맛은 쓰디썼지만 빨간 과즙이 가라앉은 모습만은 낭만적으로 기억한다. 


 마투아의 피노 누아가 그랬다. 와인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만큼 가볍다. 동글동글한 베리 들이 굴러다닌다. 그리고 옅은 딸기와 이끼. 안주가 필요 없을 만큼 식도를 달려서 넘어간다. 조금만 더, 조금만...... 한 병을 금세 비웠다. 겨울 등산에서 만난 약수처럼, 맑고 달았다. 첫인상이 좋으면 한 번 더 만나고 싶어지는 법이다. 다음 날 마트로 달려가 같은 와인 두 병을 더 데려왔다. 


'이것만 먹어야지.' 인간은 한 치 앞을 모른다. 봄이 오려나 싶은 한 해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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