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솔직히 힐튼이라고 하면 패리스 힐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잘... 지내시죠?) 물론 힐튼이 유명한 호텔 체인이라는 정도야 알고 있었지만 일 년에 한 번 정도 하는 호캉스 계획을 짤 때도 염두에 둔 서울 시내 호텔이라고 하면 시그니엘이나 포시즌스 정도이지 힐튼 호텔이 후보군에 올랐던 적은 없었다.
좀처럼 갈 일이 없는 서울역 앞, 그것도 큰 길 쪽에서는 서울스퀘어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밀레니엄 힐튼 호텔에 대해 처음 듣게 된 것은 올해 봄쯤이었던 것 같다.
이 호텔을 설계한 김종성 건축가의 또 다른 작품인 서울역사박물관을 다녀오면서였다. 이것저것 서치해 보다가 그분의 이름을 들었고, 힐튼호텔을 비롯해 SK서린빌딩, 파라다이스 호텔, 또는 김우중, 미스 반 데 로에 등 그가 설계한 건물이나 관련 있는 인물들의 이름을 마주치게 됐다.
그러다 이 호텔이 없어진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올여름쯤이었던 것 같다. 부동산 자산운용사인 이지스자산운용이 건물을 매입하게 되면서 이걸 허물고 상업 시설을 새로 지어 올린다는 소식이었다.
아무래도 용적률이 문제였다. 듣기로는 힐튼 호텔을 지을 당시 용적률이 350%였는데, 지금은 800~900%의 용적률로 건물을 짓는 것도 가능하고 주변에 이렇게 저렇게 활용할 수 있는 땅도 더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돈을 번다는 목적을 기준으로 했을 때, 현재의 건물은 땅을 그다지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건축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평을 들어왔기에 아쉽기도 했고 한참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이 많은 시기여서 꼭 그래야만 하나... 싶었으나 그 이상의 마음은 없었다. 서울에 온 지 10년 밖에 안 된 부산 사람인 나로서는 서울역 풍경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북적이는 버스 환승센터나 서울스퀘어 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란 여자친구는 생각이 좀 다른 듯했다. 어렸을 적 부모님 손잡고 유명한 크리스마스 자선 열차를 보러 몇 번인가 여길 와봤다는 것이다. 깊은 아쉬움과 함께 '올해 호캉스는 여기서 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됐고, 일찌감치 크리스마스 당일 객실을 예약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밀레니엄 힐튼을 찾았다. 사진으로 봤을 때도 그랬지만 외관을 직접 보니 '깔끔하고 멋있는 건물'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네모 반듯한 모양에 양쪽이 살짝 꺾여 들어가 있는 모습이 특이했다.
김종성 건축가는 목천문화재단에서 출판한 구술집에서 이를 두고 '남산을 껴안는다'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네모 반듯하고 반질반질하게 생겨서 차가운 인상인 줄만 알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돌연 낭만적인 인상으로 바뀌었다.
깔끔한 외관이 범상찮은 건물인 것은 사실이나, 밀레니엄 힐튼 호텔의 정수는 로비 공간에 있다고 한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얘기는 재료에 관한 것이다.
크게 서너 가지 정도가 언급된다. 바닥에는 트래버틴(대리석의 일종), 벽에는 '베르데 아첼리오'라는 녹색 대리석과 참나무, 그리고 기둥에는 브론즈를 썼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와 미국 등에서 직접 공수해 온 재료들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비용 문제 등으로 구하기도, 사용하기도 힘든 재료라고 하니 이 건물이 지어질 80년대에는 오죽했을까 싶다.
이 재료들은 건축사적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재료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멋을 갖춰가는 면이 있어 어떤 '영원성'을 드러낸다고 한다. 오랫동안 아름답게 가꿔가면 언제 봐도 좋을 재료와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건물인데 이렇게나 금방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하부 로비로 이어지는 공간이 압권이다. 이쪽이 지형적으로 내리막이라서 전체 로비를 구성할 때 곤란한 부분이 있었으나 아예 그 지형을 활용해 가장 위에서 가장 아래까지 18m 높이의 공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로비 공간의 내려가는 반전시켜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바꾸면 서울역사박물관 1층과 비슷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식물을 놓기 위한 단을 중심으로 물 흐르듯이 갈라지고 합쳐지는 계단의 모습과 위층 양 옆에 놓인 의자, 그리고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진 모습 하나하나가 며칠 뒤면 영업을 종료하는 호텔의 모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활기가 넘쳤다.
로비 한편에는 밀레니엄 힐튼의 역사를 조명하는 자그마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연혁이라든지 옛날 어메니티라든지 종업원 유니폼 등을 볼 수 있었다.
하부로비로 내려가는 곳에는 호텔 건물과 남산, 남산타워 등의 모형을 만들어 두었다. 여기가 원래는 분수가 놓이는 공간인 듯하고, 크리스마스 시즌 때마다 자선열차와 함께 꾸며지는 것 같다.
원래 이런 데에 돈 잘 안 넣는데 뭔가 그래도 보태야 할 것 같아서 돈 통에 좀 넣었다.
자선 열차는 볼거리가 빼곡했다. 다른 분들이 이전에 포스팅한 내용을 얼핏 보니 이 부분은 매년 바뀌는 것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여자친구는 어렸을 적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니 한동안 이것저것 구경하며 사진 찍고 영상 찍기 바빴다.
예쁜 장면들이 정말 많았다.
하부 로비는 운영 중이던 식당과 바가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룸은 남산 뷰로 받았다. 사실 룸에 대한 기대는 크게 없었는데 전망이 참 좋았다. 군데군데 낡은 티가 나는 것 같은 느낌이 있긴 했지만 단정하고 흠잡을 곳 없었다. 개인적으로 호텔마다 룸은 깔끔하기만 하고 있을 거 다 있으면 특별히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다.
여자친구를 따라 수영장도 가고 조식도 먹었다. 조식 뷔페가 이것저것 먹을 것도 많고 나쁘지 않았다. 농어 구이가 있었는데 그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여자친구는 쌀국수를 되게 맛있게 먹더라. 조식 뷔페라서 그런지 과일 외에 디저트가 마땅히 없다는 점은 안타까웠던 부분이었다.
체크아웃을 할 때는 참 마음이 좀 되게 묘했다. 짧은 인연이지만 너무나 좋은, 예쁜 기억을 만들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이 장소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 아팠다. 마지막 기념 촬영인지 함께 사진을 찍는 종업원분들도 있었고 이제는 여기가 문을 닫는다고 얘기하는 고객들의 대화도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인 만큼 체크아웃을 할 때 카드키를 달라고 하면 주신다는 얘기가 있어서 혹시 챙겨가도 되냐고 프론트에 여쭤보니 '사진이 다른 카드키도 있는데 그것도 더 가져가시겠냐'고 선뜻 물어봐 주신 직원분의 친절에는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멜랑꼴리하고 선덕선덕한 마음에 카카오택시를 기다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진을 찍고 여자친구와 아쉬움을 나눴다. 우리는 올해 연말 가장 강렬하고 잘 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하면서, 입을 모아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번에 1박으로 인연을 맺은 힐튼 호텔에 대해 개인적으로도 참 아쉬운 마음을 많이 품게 되지만, 솔직히 막 엄청 내가 화가 나거나 반대를 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저런 박물관과 문화유산을 열정적으로 다녀온 사람의 입장에서는, 서울 시내 궁궐을 비롯해 각종 문화유산 복원에 대해 좋다고, 잘 했다고 열광하는 모습들과, 한국 현대건축의 기념비적 작품인 이 호텔이 곧 사라지게 된다는 현실 사이에서 상당한 위화감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는 '고궁과 호텔이 같냐!'라고 일갈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다를 건 또 뭔가?'라고 묻고 싶다.
밀레니엄 힐튼 역시 한국사에서 나름의 역사와 의미를 가진 상징적인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한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최초의 특급호텔, 한국 모더니즘 건축의 걸작, 서울역의 스카이라인을 바꾼 상징물,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장면에 모습을 드러나는 건축물, 건축계에서 밀레니엄 힐튼에 부여하는 의미는 참으로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사안은 단순히 '개발이냐 보존이냐'하는 이념적 논쟁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근현대 건축을 대하는 철학과 방법론에 대한 문제로 확장될 수 있을 듯하다.
이런저런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건축가 황두진 선생님은 오늘 발행된 서울프라퍼티인사이트(SPI)의 '레거시 플레이스' 글에서 아직 이 건물의 운명이 완전히 결정된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말씀하셨으나, 사실 여러 보도나 분위기를 보면 철거 후 새 건물을 짓는 쪽으로 진행되는 것이 불가피하지 않나 싶다.
만약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최대한 현재 밀레니엄 힐튼의 건축적 특징과 철학을 계승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냥 적당히 자선열차나 계속하고 뭐 이런 거 말고, 황두진 선생님이 같은 글에서 내놓은 대안처럼 현재의 로비를 건물의 입구로 살린다든지 하는 진정성 있는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SPI 보도에 따르면, 다행히 이지스에서는 그래도 밀레니엄 힐튼 프로젝트를 원만하게 다루기 위해 여러 가지 면에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건축가인 김종성 선생님도 당연히 자신의 대표작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듯하지만, 이지스의 새 프로젝트에 완전히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지스의 이번 프로젝트는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담론이 형성되기 힘든 우리 사회에서 이분법적인 흑백 논리가 아니라, 전통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생긴다. 만약 이번 논의가 성공적인 형태로 구현된다면 건축사를 넘어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밀레니엄 힐튼이 우리에게 남기고 갈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이번 밀레니엄 힐튼 방문은 우리 커플에게도 상당히 정신적인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 되었다. 앞으로 어떤 호텔에서 호캉스를 하고, 어떤 건물을 찾아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2022년 연말의 기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카드키에 적힌 문구처럼, '기억은 영원'할 것이다. 다만 너무나도 소중한 기억을 갖게 된 개인으로서, 언젠가 이 자리를 다시 찾았을 때 그 행복하고 기분 좋은 순간을 떠올릴 수 있는 흔적 정도는 충분히 남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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