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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전시회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by 고부엉씨

해외 작가 전시로는 올해 가장 큰 기대를 받았던 전시이지 않나 싶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올해 4월 20일부터 8월 2일까지 4개월가량 열리는 '가장 미국적인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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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라는 이름이 낯선 사람일지라도 그의 대표작을 보면 '어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의 작품이 20세기 미국, 그리고 도시를 대표하는 이미지로서 각종 영상물, 심지어는 음악에까지 많이 인용되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사례가 하나 있다. 배우 공유와 공효진이 출연했었던 쓱닷컴 광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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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호퍼에 대해 그 정도 밖에 알지 못하고 있었다. 피카소나 칸딘스키 이런 화가들은 하다못해 고등학교 비문학 지문에서라도 볼 수 있을 만큼 세계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화가이지만, 사실 호퍼는 미술사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정도까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들 다 본다고 들썩들썩하는데 안 보기도 좀 그렇고... 그래서 인터파크에서 17,000원짜리 표를 사고 서울 시립미술관으로 갔다. 평일 오전이었음에도 사람이 아주아주 많았다. 전시 기간이 4개월로 꽤 긴 편이니 뒤로 갈수록 좀 널널해지지 않을까 싶긴 했으나, 끝날 때까지 난리였던 국중박 합스부르크전을 생각해보면 괜한 기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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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2층-3층-1층 순서로 보게 된다. 2층, 3층 전시실은 사진을 못 찍게 해놔서 너무 슬펐다.


[길 위에서]라는 제목처럼 전시는 에드워드 호퍼가 거쳐간 물리적 공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완전히 시간 순서로 딱딱 정리가 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적당히 그의 삶과 화풍의 전개를 그려나갈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파리 시기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재밌었다. 막 그림이 좋다 이 정도까지 느낌은 아니지만 그의 대표작들을 아는 상태에서 보니 '아 이런 영향을 받았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


그 외에 각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면 중년에 그린 "자화상"과 큼지막한 사이즈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푸른 저녁", 그리고 석양의 색깔이 정말 멋졌던 "철길의 석양"(이번 전시 포스터로 사용된 작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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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서는 각종 아카이브 자료를 비롯해 상업화가 시절 작품, 그리고 배우자인 조세핀 호퍼와 에드워드 호퍼의 관계 등을 보여주는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전시가 전체적으로 재미는 있는데, 약간 뭐가 좀 애매한 느낌이다. 많은 분들이 지적하고 있듯, 일단 호퍼의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작품이 거의 안 온 것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제일 유명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의 경우 스케치가 온 것에 만족해야 했다. '대표작'이라는 게 안 보면 그만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사실 단지 '유명한 작품을 봤다'라는 경험보다는 그 작가의 특징과 능력치를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예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랬다.


모두가 호퍼에 대해 고독, 상실, 외로움 같은 키워드를 이야기하곤 하지만 정작 이 전시에서는 그런 호퍼만의 정서를 느끼길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호퍼에 대해 어느 정도 공부는 하고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야겠다는 틀은 갖추고 갔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뭔가 '고독해서 고독한' 게 아니라 '고독해야 해서 고독한,' 다분히 중2병스러운 느낌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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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기대치 자체를 에드워드 호퍼라는 화가를 소개받고 그의 인생에 대해 알아보는 정도로 잡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뭐 고독이 어떻고 현대인이 어떻고...는 이번 전시로는 좀 힘들 듯하다.


한 꼭지를 덧붙이자면, 아내 조세핀 호퍼와의 관계가 이번 전시에서 비중 있게 조명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눈여겨본 기사 두 개를 첨부한다. 톤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호퍼 부부의 사이가 좋지 많은 않았던 것 같고 그 과정에서 조세핀 호퍼가 적잖은 희생을 한 건 사실로 보인다.

애초에 에드워드 호퍼의 작가 인생을 논하면서도 조세핀 호퍼를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는만큼 이 또한 화가 에드워드 호퍼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인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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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은 이번이 처음이라 몰랐는데, 2층에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라고 하여 천경자 선생님이 기증하신 작품 다수가 전시되어 있었다. 교과서나 책에서나 보던 작품들이 실제로 있어서 적잖이 놀랐다. 전시실이 크지 않았음에도 1, 2, 3층을 통째로 쓴 에드워드 호퍼 전시만큼이나 큰 재미와 감동이 있었다. 이래서 '안 본 눈 삽니다'라는 말이 생겼나 보다...


아무튼 에드워드 호퍼 전시는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있고 자잘하게 마음에 안 드는 점들도 있었는데 워낙 또 유명한 화가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도 다 우르르 몰려가는 김에 못 이기는 척 한 번쯤 보기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나는 미국 가서 볼 거다'라거나 '17,000원 너무 비싼 것 같다' 혹은 '인증샷이 중요하다'라는 사람의 경우 '꼭 봐야 합니다!'라고 강권하기에 약간 애매한 느낌이라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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