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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부엉씨 Dec 07. 2022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실 큐레이터와의 대화 후기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꽤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실 개편이 지난 드디어 끝났다. 언론에는 11월 22일 공개되어 기사가 우르르 쏟아졌고 다음날인 23일, 일반에도 공개가 되었는데 마침 이날이 수요일이라 [큐레이터와의 대화] 세션도 진행되었다.


상설전시실 개편으로는 아마 지난해 [사유의 방]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프로젝트가 아닌가 싶다. 보도를 찾아보니 지난 2013년에 청자실 개편 소식이 마지막이다. 설마 근 10년 만에 이뤄진 것은 아니겠지...? 정말이라면 참으로 귀한 기회라고 할 수 있겠다.


[큐레이터와의 대화]는 6시부터 시작되지만, 나는 이날 조금 늦었다. 사실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회사일로 엄청난 곤경에 처해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기분이 별로라서 박물관 입구에 다다른 마지막 순간까지 이걸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기왕 거기까지 간 김에 돌아오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갔다.

그리고 이날 [큐레이터와의 대화]에 꼭 가야 했었던 다른 이유가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의 이애령 부장님(이하 '부장님' 또는 '큐레이터님')이 세션 진행을 맡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올해 초 [조선의 승려장인] 전시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은 이후 부장님과 어찌어찌 인스타에서 맞팔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여러 전시에 대한 소식과 인사이트를 많이 전해 듣고 있기 때문에 겸사겸사 꼭 직접 한 번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다행히 지나치게 늦진 않아서 초반부 설명을 많이 놓치진 않았다. 내가 들어갔을 땐 고려청자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고 계셨다. 중국 도자기 문화가 한국으로 유입된 경로와 영향,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려청자만의 멋과 특색이 어떻게 갖춰지기 시작했는지 등의 내용이었다.


초입에 클래식 같은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이 전시실을 꾸미면서 아예 새로 작곡한 곡이라고 말씀하셨다. 국중박 청자실만을 위해 맞춤으로 작곡된 곡인 만큼 전시에 들어서면 귀를 기울여봐도 좋겠다. 

왼쪽청자 음각 연꽃 넝쿨무늬 매병/오른쪽청자 참외 모양병

입구에서 몇 걸음 더 들어가다 보면 본격적으로 청자를 볼 수 있다.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될 만큼 아름다운 비색청자 명품들이 먼저 눈에 띈다.


큐레이터님은 "청자 음각 연꽃 넝쿨무늬 매병"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면서 '가장 섹시한 고려청자'라고 설명하셨다. 전체적인 실루엣이 너무 아름다워서 과거에는 이 청자를 볼 때마다 소피아 로렌(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이 떠올랐고 요즘은 김혜수가 생각난다고 하셨다. 나는 정말 빈살만도 탐낼법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외 모양병도 형태와 색감이 완벽한 작품이었다. 이렇게 대표적인 비색청자들을 몇 점 보면서 청자 감상법에 대해서도 도움 말씀을 주셨다. 비색청자는 전체적인 실루엣과 색감을, 상감청자는 무늬나 그림 등의 표현을 중심으로 보면 된다는 것이었다.

청자 표면을 엄청 고화질로 찍은 이미지가 영상으로 쭉 나온다. 그 묘하고 아름다운 색깔이 어떻게 해서 탄생하게 된 것인지 알아가는 흐름으로 진행된다. 한쪽 벽에는 어디서 나온 문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비 갠 뒤의 먼 하늘 푸른빛에 물들다"라고 비색청자의 푸른색을 표현하는 멋진 글귀가 적혀 있다.

영상을 보고 몸을 돌려 한 발자국 더 들어가면 멋진 광경이 펼쳐진다. 이게 사진이 좀 예쁘게 안 나와서 그렇지 실제로 보면 분위기가 장난 아니다. 이 공간은 [고려비색]이라는 이름의 공간으로, 처음 봤을 때의 비주얼 쇼크는 반가사유상 두 분이 모셔진 [사유의 방]에 비할만하다.


여기에는 주로 상형청자, 그러니까 식물이나 동물의 모양을 본떠 만든 청자가 전시된다. 전 세계에 50~100점 정도 밖에 안 남은 상형청자 중 18점이 전시된다고 하니 정말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서 보면 더 멋있다는 "청자 사자형뚜껑 향로"의 모습. 가만 보면 사자가 정면을 기준으로 왼쪽에 치우쳐 있다(솔직히 가만 안 보고 딱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혼자 건성건성 보다 보면 이조차도 지나치기 쉽다.) 엄숙한 제기임에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을 두고 큐레이터님은 '이렇게 만들어도 잘 만들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개인적으로는 강아지처럼 귀엽게 앉은 모습, 친근함이 느껴지는 생김새 등을 보았을 때, 만든 분이 좀 장난기가 있고 엉뚱한 분이 아니셨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단정함이나 디테일한 표현을 보면 기본적으로 실력은 엄청난 분이셨을 거고...

왼쪽청자 투각칠보문뚜껑 향로/오른쪽청자 어룡형 주전자

다른 상형청자들 역시 이걸 도대체 어떻게 디자인하고 실제로 만들어 냈을까 싶은 최고의 명품들이었다. 큐레이터님과 우리는 투각칠보문뚜껑 향로를 받치고 있는 세 마리의 귀여운 토끼, 어룡형 주전자의 역동적인 모습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고려비색] 전시실 벽을 보면 까만 장막 같은 것을 둘러놓았다. 큐레이터님은 투각칠보문뚜껑 향로의 보주 무늬대로 만들었다고 설명해 주셨다. 이는 고려 불화에서 보살이 두르고 있는 얇고 투명한 가사(袈裟) 같은 의복을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가장 소중한 것, 귀한 것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그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다.

이어 상감청자 쪽으로 넘어간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상감청자는 무늬나 그림을 감상하면 좋은데 자연과 함께하는 사람의 모습이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긴다. 큐레이터님이 각별히 좋아한다고 한 그림은 파초 잎에 앉아 있는 두꺼비 그림이었다. 실제로 옛날에 두꺼비를 키워(...?) 보시기도 했다며 관련된 경험을 들려주셨다.


소소하고 귀여운 작품들이 많은데 나름대로 다 스토리가 있다. 이런저런 이미지를 뜯어보며 한가하고 평화로운 장면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고 함께 간 사람이 있다면 기억과 이야기를 공유하기 좋을 것 같았다.

일단 이날 [큐레이터와의 대화] 세션은 이정도에서 마무리됐다. 내용이 더 있었는데 지금은 좀 가물가물하기도 하고... ㅎㅎ 자세한 청자실 포스팅은 다음에 또 해야지 싶다.


이전에도 국중박 3층 조각공예실을 찾을 때면 큐레이터분들이 우리 분청사기나 백자에 대해 정말 큰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그걸 관람객들에게 정말 자랑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개편된 청자실 역시 곳곳에 이렇게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가꾼 디테일들이 많이 있다.


사실 아무리 전시를 좋아하고 자주 찾는다고 해도 이런 디테일들을 포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큐레이터와의 대화]는 전시 기획자들의 의도를 직접 전해 듣고 나중을 위한 안목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편안하게 모여 다니면서 그냥 박물관이나 전시실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재미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뭐 문화계 종사자도 아니고 인스타 좋아요만 누르다가 인사랍시고 드리는 게 뒤에 생각해 보니 되게 웃기긴 했는데, 아무튼 세션이 끝난 뒤 이애령 부장님께 슥 내 인스타를 들이밀면서 전시 너무 잘 보고 있다고 인사를 드렸다. 되게 반갑게 맞아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잠시 백브리핑 느낌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에 생각보다 전시실이 덥고, 회사 일로 별로 기분이 안 좋은 상태라 충분히 대화를 못 한 게 천추의 한이긴 하지만, '이번 전시실을 꾸미면서 우리 청자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전달하되 지나치지 않게, 담백하게 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씀은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홍보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보니 그 말씀에 너무 공감이 갔다. 가끔 본인 회사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강해서 과한 미사여구를 사용한다든지,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성과를 요구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순수한 애정이나 열정은 언제나 필요하기 때문에 늘 그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모든 전문가들에게 주어지는 과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청자실을 포함한 국중박 3층 조각공예실, [조선의 승려장인], [어느 수집가의 초대], [예산 수덕사 괘불] 등 올해 내가 감동을 느낀 전시를 돌아보면 거기에 늘 그런 면모가 있었다.


'잊혀진 것들, 모르는 것들을 한 번 더 살펴보자'라는 것이 이번 청자실 개편 과정에서 국중박이 잡은 목표 중 하나였다고 한다. 오래된 가마터에서 나온 작은 청자 조각에서, 한편으로 살짝 빗겨 있는 사자의 앉음새에서, 작은 몸으로 향로를 받치고 있는 토끼의 눈동자에서, 비 갠 뒤 먼 하늘을 물들이는 듯한 오묘한 푸른빛에서 우리는 모두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것들, 모르고 있었던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청자실 개편이 근 10년 만에 이뤄진 만큼, 다음 개편 때까진 못해도 5년~6년은 기다려야 하지 싶다. 그 어떤 특별전만큼이나 공들인 티가 나고 멋진 전시품이 많은 곳이니 언제 가도 그만인 상설전시실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부지런히 자주자주 찾아가기를 권한다. 가능하면 [큐레이터와의 대화]도 꼭 듣고.


마침 12월 일정도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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