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잠깐의 시간을 살고 있지만, 그 짧은 시간은 당신만의 인생이 아니다. 그 시간은 같은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이 압축된 것이며 (…) 당신은 역사의 표현이다.
- 로버트 펜 워런, 『이만큼의 세상, 그리고 시간』 *
현기영 소설가의 「순이 삼촌」의 배경이 된 북촌리의 너븐숭이4.3기념관에는 애기무덤이 있다. 너븐숭이는 ‘넓은 언덕’이란 뜻으로 현기영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시커먼 현무암들’이 너른 마당처럼 펼쳐져 있는 언덕이다. 동백꽃들이 비를 맞아 진흙 위에 꽃송이를 떨어뜨려 땅 위에서 더욱 새빨갛게 빛나는데 이곳에 4.3 때 희생된 아이들을 묻은 돌무더기가 있다. 그것들을 한참 바라보고서야 나는 ‘검은’ 돌과 ‘시커먼’ 돌 사이에 놓인 심연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눈에 저 바위는 그저 검은 돌이 아니라, 절망의 색을 띤 시커먼 돌이다. 비를 맞은 비석들은 움푹 팬 밭에 시신처럼 쓰러져 있다. 이 비석들 또한 시커먼 색이며 그 돌 위에 피로 새긴 기억처럼 「순이 삼촌」의 글귀들이 새겨져 있다. 이 밭에서 마치 뽑혀 나간 무처럼 쓰러져 죽은 사람들. 그 시신들의 거름을 먹고 그해 고구마 농사는 풍년이 들었다고 현기영 작가는 썼다. 그리고 그 밭의 주인이었던 순이 삼촌은 혼자 살아남아 밭을 일구었다.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30여 년을 같은 장소에서 살았다.
나는 순이 삼촌이 자살하기 전에 보였던 신경쇠약 증세가 내 어머니가 자살하기 전 보였던 증상과 상당히 유사한 것을 발견했다. 누군가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은 환청이 들리고 그로 인해 피해망상의 늪에 빠지며 주변 사람을 의심하고 공격적으로 대한다.
역사의 상처와 개인의 상처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역사적 비극은 결국 개인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그것을 겪은 개인은 자신의 몸속에 남은 깊은 상흔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삶을 통해 재구성되고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와 같다. 순이삼촌이 30여 년의 시간 동안 고구마밭을 떠나지 못하고 그 밭에서 죽은 사람들의 유골을 수습하며 밭을 일구고 물질하며 자식들을 거둬 먹였을 때, 내 어머니는 집을 떠나지 못하고 자식 셋을 키워 대학에 보냈으며 말년에는 건물 청소를 하며 살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왜 아버지와 이혼하지 않냐고 물어보았을 때 “이제까지 우리 집안에서 이혼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라고 답했다. 어머니의 뼛속까지 내재화된 가부장제의 악습에서 나는 그녀를 구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4.3 특별법이 지정되기 전까지 유가족들이 30여 년의 침묵 속에서 바랐던 것은 진실을 밝히고 희생자들을 위한 진혼비를 세워 그들의 넋을 진정으로 위무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증언하기 시작했다. 그날의 일에 대해. 그날의 진실에 대해. 진실을 말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 과정은 곧 언어의 진실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고통으로 발견한 언어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 아로새겨진다.
나는 내 어머니와 같은 시간 속에 있었고 그 시간 속에 내가 봐왔던 것을 여기에 기록한다. 그녀에게 언어를 되돌려 주는 것. 죽은 자를 위해 살아 있는 자가 대신 말하는 것. 그 과정 속에 개인의 상처가 역사가 되는 길 위에 선다고 믿는다. 나는 개인의 전쟁을 치른 내 어머니와 집에 갇혀 죽은 다른 어머니들을 위한 진혼비를 세울 것이다. 그녀들의 영혼이 더 이상 시커먼 절망 속에 있지 않도록. 그녀들의 삶이 곧 역사가 되도록.
* 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 제효영 옮김, 『몸은 기억한다』, 을유문화사, 2020, 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