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소연 Aug 30. 2023

김밥과 라면

노동과 자유에 대하여

회사 생활을 할 때, 나는 점심시간에 김밥과 라면을 자주 먹었다. 김밥과 라면은 내 실존과 영혼의 양식이었다. 동료, 상사들과 함께 먹으러 가는 점심이 버거울 때, 나는 혼자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런 날이면 늘 망원동 그 분식집에서 김밥과 라면을 먹곤 했다. 나는 라면에 계란 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늘 가던 그 분식집은 라면에 계란을 풀어 주었는데, 오전 업무가 덜 힘든 날에는 분식집 사장님께 계란을 풀지 말아 달라고 말할 기운이 있었고, 오전 업무가 힘들었던 날에는 계란을 풀지 말아 달라고 말할 힘조차 없었다. 그래서 사장님도 내가 가면 계란을 풀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매일 오전 11시 30분이면 먹어야 하는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것조차 지겨운 날에는 나는 저절로 그 분식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당근채가 듬뿍 들어간 그 김밥 한 줄과 대체로 계란이 풀어진 라면에서 국물과 면발의 힘으로 오후 업무를 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김밥과 라면은 내 노동의 원동력이자 몸과 마음이 헛헛해지는 날이면 자동적으로 찾게 되는 음식이 되었다.  

제주에 와서 사는 지금, 나는 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카페 알바를 하며 틈틈이 글쓰기 수업을 준비하는 프리 워커의 삶을 살게 되었다. 사무실 책상이 익숙하던 나는 카페 알바를 하면서 매우 빠르게 몸을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 ‘애기바당’이라 불리는, 암초들이 수영장처럼 둥그렇게 바닷물을 감싸고 있는 이 아늑한 해변 바로 앞에 있는 카페를 찾는 손님들을 위해 나는 30초 안에 주문받은 음료를 제조하는 법과 물놀이 용품을 대여하는 법, 매장과 화장실 청소를 빠르게 하는 법을 배웠다. 주로 가족들과 연인, 친구들이 이 해변 카페를 찾기 때문에 여름휴가철이면 우리는 쉴 틈 없이 몸을 놀려야 했다. 어린아이를 안고 온 젊은 엄마, 아빠들은 나의 시선을 끌었다. 아기들은 매일매일이 신기하다는 듯이 운다. 그 울음소리가 카페를 가득 채우는데, 그 아이를 데리고 놀러 온 젊은 엄마, 아빠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가 될까 노심초사한다. 한 아기 아빠는 “아기가 응가가 마렵다고 해서 응가 싸고 나서 음료 가져갈게요.” 한다. 그럼 나도 “네, 그러세요.” 한다. 아기가 응가가 쉬이 나오지 않는지, 주문한 음료가 나온 지 30분이 지나도 아기와 아빠는 음료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그들이 음료를 찾으러 왔을 때 나는 안도한다. 부디 노심초사하지 않고 이 낙원 같은 바다 앞에서 안식을 찾기를. 

신기한 건 나는 이 육체노동에서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몸을 바쁘게 놀리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먹는 초콜릿케이크나 크로플 같은 간식은 꿀맛이었다.(손님들이 너무 많은 날은 이런 간식을 먹을 시간은 당연히 없다) 급여는 매주 주급으로 지급받았다. 한 주 벌어 한 주 먹고사는 삶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정규직 노동자이던 시절에 먹던 그 김밥과 라면은 어땠을까? 그때의 김밥과 라면은 맛있기도 했고 맛이 없기도 했다. 사실 나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오후 업무를 해내기 위해 밀어 넣는 음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허한 날이면 나는 왜 본능적으로 김밥과 라면을 찾게 되는 것일까? 이런 습관은 제주에 와서도 이어져 4개월간 제주를 여행하는 내내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사 먹는 대신 바닷가에 앉아 김밥을 먹으며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이 내게는 최고의 식사였다. 바닷가에서는 라면을 곁들이는 대신 막걸리를 곁들였다. 김밥과 막걸리. 이 두 음식의 조화는 내게 가장 최고의 조화였다.

나는 김밥과 막걸리가 아주 맛있다는 것을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등산을 다니면서 종종 나를 데리고 다녔다. 도봉산 입구에서 사들고 갔던 그 김밥. 깻잎 한 장이 들어 있던 그 김밥. 나는 그 김밥의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김밥집은 어머니가 오랜 시간 등산을 하며 발견한 맛집이었고, 나는 그 채소 한 장의 힘을 지금도 기억한다. 

나는 한겨울 등산길에 어머니와 둘이 나눠 먹던 김밥과 막걸리의 맛을 기억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도 우리를 괴롭게 하지 못했다. 나는 그곳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5년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노동과 자본의 노예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제주로 왔다. 그러나 한낱 자본주의의 미물인 내가 어찌 그 강력한 쇠사슬로부터 자유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럴 때마다 나는 제주의 광막한 바다를 바라보며 김밥을 먹고 막걸리를 마셨다. 여자 혼자 바닷가에 이러고 앉아 있으면 가끔 젊은 남자가 와서 말을 걸곤 했다. 다행히도 제주에 홀로 여행 온 젊은 남자들은 성정이 사악하지 않다. 그들은 정말로 대화가 하고 싶은 것이었다. 제주까지 온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자연에게서, 사람에게서 작은 위안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제주는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다. 다만 육지와 분명 다른 논리로 흘러가는 곳임에는 분명했다. 제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경쟁’을 몸서리치게 싫어하고 노동을 과도하게 하는 것을 싫어한다. 내가 정착한 동쪽 지역의 경우 그러한 성향은 더욱 강하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되, 공동체 문화가 강하게 자리 잡았다, 뭉칠 땐 뭉치고, 흩어질 땐 흩어진다. 

제주로 『글쓰기의 최전선』을 주문하여 배송받고 나서 나는 아차, 했다. 책을 몇 장 들춰 읽었을 때야 내가 이 책을 이미 읽었고 이 책의 구판이 서울 집 책장에 꽂혀 있다는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이 책을 두 번째로 읽게 되었다. 같은 책이라도 삶의 조건과 환경이 변화한 상황에서 읽으면 매우 다르게 읽힌다. 나는 제주로 주거지를 옮겼고, 주거 환경도, 하는 일도 모두 바뀌었다. 이것은 나의 특단에 따른 조치였다. 나는 40년 가까이 살아온 서울에서는 아무것도 새로 시작할 용기도 의지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물리적인 환경 자체를 바꾸는 것부터 실행해 보기로 했던 것이다. 

헛간을 개조하여 만든 단층 구옥 주택에 아담한 마당이 있는 제주 집은 손이 많이 가고 부지런해져야 사람 사는 집 같아진다. 구석진 벽에는 늘 거미줄이 새로이 쳐지고 그것을 거둬내면 거미들이 또다시 새로운 실을 뽑아 은실 같은 집을 지어낸다. 잡초들은 베어내면 금세 다시 쑥쑥 자란다. 땅이 비옥해 집안까지 이따금 지렁이가 출몰하고, 요가를 하려고 거실에 누워 있으면 천장으로 지네가 재빠르게 지나간다. 나는 벌레들이 이렇게 빛의 속도로 자신의 은신처를 찾아 이동하는 데에 경이를 표하게 되었다. 내 처지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기를 쓰고 그들을 몰아내는 데에 초연해지게 되었다. 

다만 반자연인의 삶에 여전히 자본의 문제가 끼어드는 현실은 이곳에 와서도 여전한 것이다. 나는 파이어족이 아니었다. 직업 전선에서 은퇴하고자 한 적이 없으니 은퇴 자금 같은 것이 내게 충분히 있을 리 만무했다. 돈이 충분치 않다고 해서 나는 나의 시간을 함부로 다른 이에게 고용되는 형태로 팔고 싶지 않았다. 주 2~3회 카페 알바, 글쓰기 수업 투잡을 병행하는 생활이 시작되면서 나는 정규직 노동자의 삶이 아닌 불안정한 프리랜서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면서 나는 혼란스럽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삼십 대 때도 이와 비슷한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 불안에 결국 굴복하고 다시 정규직 노동자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규직이라 해도 중소 규모의 출판사에서 일하는 삶은 핵심 업무인 편집 업무 외에 각종 술자리와 저자와 출판사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계약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일, 경쟁 관계에 놓인 동료의 중상모략을 쳐내는 등 과도한 인간관계에 휘말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현재도 매우 불안정한 상태임에도 마치 깃발을 세우고 저항하는 사람 모양으로 내 시간을 사수하는 데에 필사적인 것이다. “함부로 팔지 않는다. 내 노동을, 내 시간을.” 

제주의 모진 바람을 맞고 있으면, 드넓은 바다를 보고 있으면, 나는 불안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읊조리게 된다. 이대로 돈이 다 떨어져 굶어 죽을 상황이 온다고 칠 때 가장 큰 문제는 타인에게 돈을 빌리거나 아쉬운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는 등의 최악의 상황을 자주 떠올리면서도 나는 예전의 나와 달리 ‘그래도 버텨 보자’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이다.

서울에 있었다면 나는 ‘버틴다’라는 말조차 신물이 날 지경으로 아무런 의지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제주란 자연환경이 주는 특수한 마법의 산물로, 투박한 돌무더기, 사나운 바람, 뜨거운 햇볕 속에서 나 역시 살아내려 안간힘을 다하는 잡초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잡초가 되기에 나는 뿌리조차 내리지 못한 미약한 미물일 뿐이다. 이 미물에게는 지금 이 시간, 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혼자의 시간이 삶의 최전선인 것이다. 지금 나에게 열려 있는 것은 온갖 새로운 실험뿐이다. 카페 일을 배우고, 나의 원고를 출판사에 투고하고, 글쓰기 강사가 되고, 마당의 잡초를 뽑고, 텃밭에서 루꼴라를 채취해 파스타를 해 먹고, 가을에 먹을 쪽파, 부추 모종을 심는 일이 내가 요즘 시도하는 실험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이전에 해본 적 없는 새로운 일들이다, 실험실 속의 쥐로 살 것인가, 아니면 야생의 들판에 나가 깨지고 다치면서 살 것인가? 나는 이미 전자의 삶에서 나와 후자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버린 셈이다.


나는 야생과 더불어 고향 없이 떠도니
창백한 꿈의 시간을 헤매는구나

- 엘제 라스카 쉴러, 「쫓겨난 여자」*


제주에 살게 된 지금, 나는 점차 김밥과 라면을 먹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김밥과 라면은 식사를 차릴 시간과 에너지가 없는 사람을 위한 음식이다. 필사적으로 내 시간을 사수한 결과 나는 매끼 식사를 공들여 준비한다. 혼자 하는 식사임에도 마당에서 루꼴라를 따와 캐슈너트와 함께 갈아 페스토를 만들고, 미나리, 쪽파를 썰어 전을 부쳐 먹고, 오이, 아삭이 고추를 썰어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는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마음이 헛헛한 날에는 감밥과 라면이 먹고 싶어 진다. 김밥 한 줄을 만들고 썰어낸 타인의 수고로움과 라면 공장에서 라면 면발을 뽑아낸 사람의 노동, 분식집에서 라면 한 그릇을 끓여내던 사장님의 마음, 산길에서 김밥을 먹던 내 어머니의 활기, 수평선을 바라보며 김밥을 베어 물던 나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이 음식들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 엘제 라스카 쉴러 지음, 배수아 옮김,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아티초크, 202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