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이 싹을 틔우는 순간
혼자 부산현대미술관에 가다.
작년에 일하는 곳 근처에 미술관이 있었다. "한 번도 들어가 볼 생각을 왜 하지 않았을까?"
자주 지나치는 곳이었지만, 오늘은 한번 가보자 하는 생각에 점심시간에 무작정 미술관에 갔다.
전시의 주제는 "누구의 이야기"였다.
처음으로 간 미술관이 어색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로지 작품에 몰입할 수 있어 맞바꾼 점심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씨앗을 오마주로 한 작품이 있었는데, 유독 그 작품에 마음이 끌렸다. 멀리서 보면 어떤 형상인데, 가까이 가서 보니 수많은 팥을 그려놓은 작품이었다. " 왜 이렇게 팥을 그렸을까?" "이 화가가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그 작품 앞에서 한참을 서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중에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보니, 그 작품은 정정엽선생님의 [씨앗]이라는 작품이었다.
나는 식물 키우기에는 정말 재능이 없다. 선물 받은 화분도 잘 키우지 못해서 애써 죽이기 일쑤였다. 딸들이 학교 과제로 식물 키우기 씨앗을 받아왔다. 반갑지 않았다. 잘 키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매일 물 주고 정성을 들였다.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에도 씨앗은 꿈적하지 않았다. 물을 많이 줘서 씨앗이 썩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씨앗을 뒤로한 채 우리 가족은 3박 4일 일정으로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여행을 다녀온 뒤, 짐정리를 하면서 분주한 마음들로 이틀 동안 캐리어는 거실에 더 머물렀다. 이제 캐리어에서 짐을 다 빼고 베란다 창고에 넣으려는데 발 밑에 화분이 부딪혀 걸렸다.
"어머, 이게 웬일이야?"
화분에 싹이 나있었다. 집을 비운 사이 물도 못주고, 돌봐주지도 않았는데 싹이 나있다니 너무도 경이로웠다.
"얘들아, 여기 화분에 싹이 났어." 기쁜 나머지 딸아이들을 소리쳐 불렀다.
아이들은 그때부터 기뻐하며, 사명감으로 그 화분에 모든 정성을 더 쏟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그 대견한 씨앗을 잊을 수 없다. 집을 비운 사이 돌봐주지 못했는데, 씨앗은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싹을 틔운 것이었다.
오늘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생명력이라는 게 얼마나 강인한지를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식물에 비유한다.
"마른 씨앗은 3,000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유리한 환경이 생기면 식물로 성장한다."
내가 왜 그 씨앗을 보고 대견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씨앗]이라는 작품을 보면서 화가가 이 수많은 팥을 그리면서 무슨 생각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그 작품 앞을 떠나지 못했을까?
마른 씨앗이 스스로 싹을 틔우기까지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견뎌온 그 의지는 무엇일까?
나는 작은 씨앗에게서 배운다.
씨앗의 꿈, 그리고 의지, 생명력들을 말이다.
어제 나는 브런치스토리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작가라는 씨앗의 꿈이 싹을 틔운 것 같아 기뻤다.
씨앗도 이렇게 생명력을 가지고 끈질기게 견디는데 나도 열매 맺기까지의 시간을 응원하고 싶다.
더딜지라도 서툴지라도 나의 꿈을 응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