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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선 May 13. 2021

결혼은 결심하는 게 아니던데요

이번생에 결혼은 처음이라 - 1 -



"우리 결혼하면 진짜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친구의 소개로 만난 동갑내기 전 남친이자 현 남편, B와의 연애는 꽤나 높은 온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출근의 압박에 시달리는 직장인 둘이 만나, 대학생 때보다도 내일이 없는 연애를 매일 이어갔다. 일요일 하루종일 놀이공원을 활보하고도 에너지가 남아 노래방을 갔다가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다음날 출근하고, 다른 일정이 끝나고서라도 기어코 만나 열흘 연속 산책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만만치않은 성격에 어느 한 쪽도 져주지 않는 동갑내기 둘이 만나 무섭게 싸우기도 했지만, 금세 눈물콧물 쏟아가며 화해를 하곤 했다.


결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 이사람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연애였다.

그러니까, 결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자랄 것 없이 화목한 집에서 사랑 듬뿍 받고 자란 B에게, 결혼이란 본인 인생의 '항수'였다. 학교를 가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그렇게 살아온 그가 그 다음 단계로 밟아야 하는 코스.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한 그는 애초에 결혼할 상대를 서서히 생각하던 차에 나를 만난 거였다.



"난 아직 결혼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한편 나에게 결혼이란 항수보단 '변수'에 가까웠다. 마음 한 켠에 어떤 동화처럼 자리잡은 실체 없는 개념이었다. 미치도록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어떤 사람을 만나,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려 선택하게 되는, 어쩌면 로또같은 어쩌면 자연재해같은 그런 것. 결혼처럼 중요한 문제를 그런식으로 운명에 맡기고 30년 가까이를 살았다니. '백설공주', '잠든 숲 속의 공주' 같은 수동적인 동화를 보며 자랐던 탓이었을까 우스운 생각도 해본다. 게다가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결혼과 출산이란 명백히 일종의 패널티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마치고 돌아와 본인 의지와는 상관 없이 팀을 옮겨야했다던 옆팀 과장님. 결혼을 하며 남편과 함께 외국으로 혹은 지방으로 가야하는 탓에 회사를 그만두었던, '에이스'로 불렸던 선배. 채 4년도 다니지 않은 일터에서 나는 숱한 살아있는 증거같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애 낳고 나니 자꾸 할 일을 깜빡깜빡한다"느니, "애 임신했을 때 영향으로 눌린 위가 아직도 역류성 식도염으로 남아서 고생 중이다", "애를 낳고 나니 체력이 확 떨어져서 예전만큼 일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들은 미혼인 나를 공포에 떨게하기 충분했다. 정작 본인들은 웃으며 하소연한 가벼운 말들이었는데도. 그런가하면 회사의 많은 기혼자들은 진심인지 위악인지 곧잘 배우자에 대한 푸념을 쉽게 했다. 그리고나면 '결혼은 최대한 미루거나 하지 말라'는 간편하고 하나마나한 결론을 내곤 했다.  


운좋게 동성의 상사들이 많아 나는 손쉽게 실눈을 떠가며 나의 미래를 점치곤 했는데, 확연히 미혼의 상사들의 일상이나 업무 패턴이 자유로워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훌륭한 반례들(?)도 많이 존재헀다.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리더 역할을 척척 수행해나가는 멋있는 사람들. 몸은 두 배로 힘들텐데 오히려 더 단단하게 버티는 그들을 보며 존경심을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존경하는 마음이 닮고 싶은 마음으로 금방 연결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제인 구달을 존경한다고 해서 당장 침팬치들을 찾아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너와는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네."

"왜?"

"나는 너랑 결혼을 꼭 하고 싶은데. 너는 결혼 생각이 없으니까."



그리고서는 풀이 확 죽어버린 이 녀석, 진심이다.

연인들끼리 하는 실없는 장난이 아니라 진짜 당장 결혼을 생각하고 싶은 거였다니.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왜 기뻤을까? 누군가 진지하게 나와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결혼을 생각한다는 게, 마치 그만큼 나를 사랑한다는 뜻인 것만 같아서 나는 살짝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되어버렸다.



"생각은 안 해봤는데, 너랑이라면 내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무 생각 없이 신나서 뱉은 그 말이 나를 결혼까지 한달음에 달려가게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해맑았던 그때 나의 등짝을 마구 때려주고 싶지만,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대도 나는 같은 말을 하고 싶다.



"너랑이라면!"



너무 당연한 말이겠지만,

결혼은 언제 어떻게 하냐보다 누구랑 하냐에 모든 운명이 달려있으니까.


나는 늦게 결혼할 줄 알았다며 몇몇 사람들은 물어왔다.



"결혼을 어떻게 결심하게 됐어?"



글쎄, 나는 결혼을 결심한 적이 없다. 결혼을 결심하고 '레디, 고!'하고 준비를 시작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연애 초기의 달뜬 가슴과 달콤한 속삭임에서 시작해, 답이 안 보이는 갈등을 함께 뚫어내고나니 결혼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 되어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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