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지는 것들
이런 사달은 일어나지 않을까.
여기 터 잡은 지난 몇 해 동안 나는 부지런히 씨앗을 뿌렸고, 모종과 묘목을 심었다. 게 중에 많은 것이 사라졌다. 가뭄에 마르고, 장마에 썩고, 두더지에 갉히고, 풀에 치이고, 병들고, 시들고, 얼어서 죽었다. 그 사라지는 것들에 그의 예초기 또한 한몫을 했다.
물론 평소 꼼꼼하지 않은 그의 일처리(순전히 내 주관적 견해다)를 우려했기에 사전에 주의를 단단히 주었음에도 결과는 심각했다. 언덕 너머 긴 밭 가장자리에 쪼르르 심어놓은 돌복숭아 묘목 열 그루가 몽땅 잘려나간 것이 시작이었다. 이웃에서 얻어 온 두 뼘 남짓한 길이의 일 년생 묘목이었기에 개망초 무리와 함께 제거되었다.
씁쓸해도 잘잘못을 짚기엔 무리였다.
그 후 감, 밤, 대추 같은 2년생 유실수들이 두 해를 못 넘기고 유실되면서, 나는 부주의한 예초를 탓하며 생각날 때마다 울화를 터뜨렸다. 가을에 캐서 겨우내 고이 저장해 두었다 봄날에 화단에 묻은 알뿌리 화초들이 꽃대를 겨우 올리자마자 동강 나서 나뒹구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이른 봄부터 모종판에서 공들여 키워 정식한 한해살이 꽃들이 꽃 몽우리 째 예초 날에 스러졌을 때도, 탐스런 덩이를 주렁주렁 매달며 익어가는 노각 줄기가 발목부터 댕강 잘려버린 걸 사나흘 후에 알아차렸을 때도, 나는 다시는 그에게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그 다짐은 순식간에 허리춤까지 차오르는 풀숲에서 거듭 길을 잃곤 했지만….
그의 부주의함만 탓하려는 건 아니다.
내 안이함이나 소홀함도 영향이 컸다. 예초기가 미치는 파장을 넉넉히 계산하지 못했고, 지켜야 할 것들 주변을 미리 깔끔하게 정리해두지 않은 탓도 있고, 꽃과 나무가 들어앉은 자리를 현장 지도를 통해 그에게 조목조목 가르치지 못한 때문도 있다. 비슷한 처지와 환경의 지인들과 공감대가 형성될 만큼 나만 겪는 일도 아니다. 나만이 알고 있는 정원과 밭의 지도를 남편과 섬세하게 공유하기 어렵다는 걸 기꺼이 인정한다.
무릎도 보호할 겸 집으로 돌아가는 내리막길은 뒷걸음으로 내딛는다. 운동 삼아 걷는다 생각하니 엉킨 마음이 슬그머니 풀린 것 같다. 만사가 허허롭고, 어떤 깨달음이라도 얻어 움켜쥔 걸 다 내려놓은 것만 같다. 나 자신이 기특해지기까지 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뒷걸음질이 가볍다. 보슬비가 뚝 그쳤다.
잘 부푼 달걀찜도 내고,
된장찌개도 끓이고, 노각도 무치고 깻잎나물도 곁들여 저녁상을 차린다. 식사 준비되었으니 얼른 올라오라는 내 부름에 무심함과 담담함이 느껴졌던 걸까. 오후에 벌어진 텃밭 일을 마음에서 이미 덜어낸 듯 식탁 앞에 앉은 남편의 낯빛이 예상보다 밝다.
이런저런 짤막한 대화를 나누며 밥공기를 거지반 비웠을 즈음이다.
“있잖아, 아까 나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해서 참을 수가 없어서 저쪽 뱃재 고개까지 우산 쓰고 걸어갔다 왔어.”
불쑥 튀어나왔을 뿐이다. 식탁을 차릴 때만 해도 작정하지 않았다. 정녕, 단연코(!) 의도치 않았다.
남편은 나를 흘낏 보고는 다시 숟가락질을 한다.
“당신도 알겠지만, 내가 아끼던 나무라 잘 키워보고 싶어서 눈에 잘 띄라고 주변 풀도 다 뽑아놨었거든. 잘 안 자라서 신경도 많이 쓰였던 나무였어. 혹시 실수로 당신이 벨까 봐 파란색 막대도 눈에 띄라고 꽂아놨고….”
이미 텃밭에서 다 쏟아냈던 말이다. 반복은 위험하다는 경보음이 정수리에서 몇 차례 울리지만 멈출 생각은 없다. 텃밭에서와 달리 감정을 싣지 않은, 도리어 쾌활함까지 묻어나는 내 말투에 스스로 취해가는 느낌이다.
“어… 미안해.”
뭐지? 어쩐 일로 순순히 사과를 한다. 그는 평소 이런 내 잔소리에 묵묵부답으로 피해버리거나, 큰 목청으로 대꾸해서 결국 말다툼으로 치닫고야 마는데,
이런 순순한 사과는 정말 오랜만이다.
여기서 끝내야 한다. 나는 링에 오르고 싶지도, 그를 링에 올리고 싶지도 않다. 그냥 속상했던 마음을 뒤늦게라도 알아주기 바랐거나 그깟 일 옹졸하게 품지 않고 너그럽게 넘겨버리는 나를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정말 그뿐인가.
뜻밖의 사과에도 여며지지 않고 터진 말문은 어느새 예초기 회전날처럼 작동을 시작한다.
당신에게 예초를 부탁하기 전부터,
그 며칠 전부터 나는 긴장이 되고 불안해진다고,
당신은 손에 뭔가를 쥐고 일만 시작하면 바짝 달아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주의해야 할 지점을 알려주려 해도 건성으로 듣고 성마른 사람처럼 구니까 나는 때로 숨이 막힐 것 같다고, 그게 내 예민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이게 반복된다는 건 당신에게도 문제가 있으니 돌아봐야 한다고, 그러니 무슨 일을 하건 차분하게 주변 의견을 귀담아 들어달라고….
그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밥공기를 긁는 숟가락질 소리만 낮게 반복된다. 몇 알의 밥풀이 들러붙어 꿈쩍 앉는다. 마지막 밥 한술을 입에 문 채 그가 일어난다. 자신의 밥그릇과 수저를 개수대로 가져다 넣는 그의 움직임에 체념이 서려 있다, 고 나는 느낀다. 문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차마 보지 못한다.
식탁에 마주 앉자는 건 화해의 손짓이고, 맛있게 먹어주는 건 받아들임이다. 다정한 무드를 깔아보겠다 마음먹진 않았지만 불편한 주제를 메인 요리로 먹으라고 강요한 셈이 되었다. 또 실패다. 링이 아니라 혼자 펼친 난장판에 홀로 남는다.
반쯤 남아 어두운 빛으로 급격히 쪼그라드는 달걀찜을 물끄러미 본다.
문득 밥상 앞 세월이 보인다. 가난하고 형제 많은 남편의 어린 시절 밥상에는 오를 수 없었던 달걀찜을 양계장 집 딸인 나는 엄마가 자주 해주던 방식으로 요리해서 종종 올린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다. 달걀말이에 비해 달걀찜은 남편이 즐기는 반찬이 아니다. 좋다 싫다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입이 까다롭지 않고 먹성 좋은 남편의 숟가락질 속도나 한 번에 퍼가는 양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가끔은 내 독촉에 두어 번 더 숟가락이 오가지만 깔끔하게 비우는 경우는 드물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