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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안녕 Dec 19. 2021

경계의 속사정 5

땅을 가르다

*4에 이어...



단순히 취향의 문제라면 존중하면 그뿐일 텐데…

일터가 다르거나 생활공간이 떨어져 있을 때도 좀 더 그러하겠지만, 함께 일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한결 평화롭다. 같은 일을 도모하다 보면 사이는 자주 어긋난다. 게다가 한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해야 할 때면 긴장이 흐르다 못해 결국 불꽃이 튄다.

 

취향 차이를 넘어서라도 우리 부부는 함께 일하기 좋은 파트너가 아니다. 

어느 한쪽도 특별히 뛰어나지 않은 재능, 일하는 스타일의 묘한(20년 전 검사지만 그때 그와 나의 MBTI가 같은 유형으로 나와서 매우 당황스러웠다) 이질성, 일처리에 대한 종잇장 같은 상호 신뢰의 수준 등등이 우리 부부의 협업과 동업을 필사적으로 가로막았다. 게다가 이곳 시골에서는 일터와 일상이 분리된 도시에서 머리만 맞대고 풀어야 했던 자잘한 과제들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들이 전면적으로 펼쳐졌다. 




농사와 집 관리!

시골에 와서야 우리는 서로 간의 좁힐 수 없는 간극과 벽의 두께를 실감했다.  

남편은(가끔은 나도) 출근하는 직장이 따로 있지만, 일상의 터전은 또 하나의 일터가 되어 휴일이면 마당에서 망치와 톱을 들고 만났고, 삽과 호미를 들고 밭에서 만났다. 그게 시골살이였다. 밭을 일굴 때부터 거름의 양이나 작물 선택, 가꾸는 방식, 거두는 시기와 갈무리에 이르기까지 우린 부단히 투쟁하고 조율했다. 예초에 얽힌 오늘 같은 애증은 작은 일부일 뿐이었다. 물론 간간이 서로 응원도 하고 힘도 보태고 보람도 나누었다.


그럼에도 몇 달 뒤 수확물을 담보로 잡고 현실을 다독이기엔 당장의 마찰과 불신이 불편했고, 무엇보다 결실의 충만감이 예상보다 대단치 않았다. 그럼에도 상처뿐인 영광마저 포기하기에는 가진 땅이 넓었고, 살아야 할 날들이 아득했으며, 이루고자 하는 욕망은 쪼그라들지 않았다. 

남편은 주말의 휴식이 있는 삶을 원했고, 나는 자급자족의 삶을 갈망했다. 남편은 저투자 고효율을 원했고, 나는 우직한 자연의 섭리를 동경(만!)했다. 남편은 수확으로 인정받길 원했고 나는 과정에서 의미 있길 바랐다.

 

아니다.

더 솔직해지자면, 나는 도시에서 벌어오는 봉급으로 일상이 안정되길 바랐고, 더불어(아니 덧붙여) 땅에서 거두는 결실 또한 풍성하게 보람차길 바랐다. 

한마디로 남편은 두 가지 일을 하기엔 힘이 달렸고, 나는 한 가지만 하기에도 욕심이 넘쳤다.(이렇게 쓰고 보니 다 내 탓인 것 같아 영 손해 보는 기분이다)

     

그래도 더 잘 살아보자고 시골까지 들어왔는데,

손바닥만 한 밭 쪼가리와 덧빵 하며 지탱해 가야 하는 오래된 가옥 때문에 이런저런 사연을 달고 근근이 지탱하는 관계마저 가를 순 없었다. 우리의 터전 한가운데 박혀있는 거대한 바윗돌 같은 서로의 욕망을 다듬고 매만지며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보기로 했다. 

현실적인 걸림돌부터 제거해야 했다. 허망하거나 허랑 할 수 있음에도 또 다른 약속에 기대기로 했다.

 

가까스로 조약이 체결되었다. 

부부관계를 유지함에 새로운 복병으로 등장한 '땅'을 가르기로 했다. 갈라서지 않으려면 땅이라도 갈라야 했다. 화근의 싹을 자르기 위해 처음엔 이웃 농부에게 땅을 맡기자 했으나(나의 진심이었다기보다 남편을 떠보기 위해 으름장을 놓는 수준이었음을 지금은 고개 숙여 인정한다) 남편은 망설였다. 그러고는 한 번 더 도전 의사를 내비쳤다. 하여, 언덕 너머에 있는 300평에 못 미치는 ‘긴밭’의 관리와 주체는 남편이, 집 주위 텃밭과 정원은 내 몫으로 두기로 하였다.

 

‘땅 이혼’은 효과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땅을 가르기로(법적 서류상으로는 내 소유임에 변함없지만) 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충실한 지 올해로 3년 차가 된다. 분명 눈에 띄는 마찰이 줄어들었다. 상생을 위한, 아니 자신의 영역만이라도 지키기 위한 분할은 분열을 늦춰준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대만큼 환상적이고 완벽한 남남은 되지 못했다. 

구두로 합의된 ‘상대 밭에 대한 접근금지’ 명령은 자주 위반되었다. 땅 관리인의 암묵적 동의나 요청에 의해 특별 출입이 허가되어 자율적인 왕래가 드물지 않게 따랐다. 무엇보다 그간 하던 버릇대로 상대의 땅으로 눈길이 가고, 발길이 닿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서로를 필요로 했고, 어쩔 수 없이 서로의 경계를 넘보려는 욕구를 다스리지 못했다.


내 텃밭에 틀을 만들어 주던...


지금도 우리의 거리두기 혹은 갈라서기는 숙려기간인 셈이다.

아마 우리가 법적으로 갈라서는(텃밭 분리 말고 진짜 부부관계 이혼 말이다) 날이 오기 전까지는, 회의적(?)인 예측이지만 이 숙려 상태는 더 깊어지고, 기간은 더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다.  


나는 오늘의 사건으로 잠깐 놓쳤던 '땅 이혼' 서약을 되새김질해 본다. 

'허...' 하며 무언가 툭 내려앉는다. 편안해진다.

내 가슴팍이 태평양처럼 더 넓게 느닷없이 휴머니즘으로 열리거나, 당혹스럽게 훅 치고 들어와 가부좌를 트는 '연민 따위' 때문은 아니다. 아마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하면서 부질없는 욕구에 반응하는 헛웃음이 가슴 언저리부터 중심을 향해 노글노글하게 자꾸만 데워가는 기분 탓이다.

.

개수대 안에 나뒹굴고 있는, 반으로 쪼개진 달걀 껍데기를 잔반통에 담는다. 설거지를 끝내고 나면, ‘아까는 미안했다. 내가 지나쳤다’고 그에게 카톡을 날릴 것이다. 그는 ‘다시는 예초해주나 봐라’며 곧추 세우고 있던 마음의 심지를 잠시 빼둘 것이... 뻔하다.

문득, 어떤 '선명한 경계'가 두려워질 때가 있다는 걸, 그도 나처럼 느낄 거라고 믿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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