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식 않먹지?」
아랫집에 사는 남편이 보내온 카톡이다. 역시 짧은 문장에도 어김없이 어긋난 맞춤법이 눈에 먼저 박힌다. 평소대로라면 미간부터 좁혀 세웠을 테지만, ‘않’이든 ‘안’이든 부정을 대표하는 이 강력한 부사에 깔린 뉘앙스에 먼저 끌린다.
무르고 시큼한 키위 하나와 삶은 땅콩 몇 알로 이른 저녁 끼니를 때웠다. 위염이 도졌는지 간밤에도 뜨거운 기운이 뱃속을 휘젓기에 오늘은 더 이상 먹지 않겠노라 결의에 찬 양치까지 하고 난 직후였다.
소화에 원활하지 않는 음식은 자제하겠다고 번번이 선언만 하던 내가 신경 쓰였는지, 남편은 자신의 대표 요리를 제공하기에 앞서 조심성을 담은 부정 의문문을 띄운 것이다. 나는 ‘아!’와 ‘어……’ 사이를 3초쯤 헤매다가 답 톡 한다.
「떡볶이?」
「응」
「너무 맵지 않게」
「알겠음」
후회는 맛있게 먹고 나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
남편과 내가 이름 대신 ‘어묵’과 ‘떡볶이’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공동육아로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 부모와 교사와 아이들 사이의 위계를 없애고 친근한 소통을 위해 별칭을 지어 부르는 문화가 한창이었다. 딱히 염두에 둔 별칭이 없었기에 일곱 살짜리 아이가 별 고민 없이 내게 던진 ‘떡볶이’를 넙죽 받았다.
당시만 해도 떡볶이가 다양한 변주로 요리되던 때는 아니었다. 고추장 떡볶이로 대표되는 이 뻘건 음식의 이미지가 내 생김새나 말투, 성격을 설핏 접한 그 아이의 발상에 힌트가 되었을까. 아니면 아이가 단순히 좋아하는 음식이었거나 순간의 무해한 식욕 표출일 수도 있었다. 내 정체성이나 이미지를 찰떡같이 대변하는 느낌은 없었지만, 딱히 다른 대안도 없으니 낙점된 별칭은 그럭저럭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머잖아 남편 별칭을 작명할 차례가 왔다. 별칭을 구한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까운 부모 중 누군가 툭 던진 말.
「떡볶이엔 역시 오뎅이지!」
「와아, 찰떡궁합이네.」
「짝짝짝!’」
그 자리에 있던 부부 몇 쌍의 박수까지 받으며 ‘어묵’ (아주 잠깐 '오뎅'과의 경합 과정에서 설왕설래는 있었지만)으로 만장일치 통과되었다. 무던한 남편은 별칭의 의미나 뉘앙스보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에 상기된 듯 아무거나 상관없다며 흐뭇해했다. 그렇게 나와 남편, 우리 두 사람은 부부나 부모 외에 음식이라는 새로운 상징으로 연결되고 얽혔다.
포차나 분식점의 간판 주자인 ‘떡볶이와 어묵’이 정녕 환상궁합인지는 먹는 이들의 취향에 달렸겠지만, 당시 우리 두 사람이 짝꿍으로서 찰떡이거나 환상적인 부부로 보였을 리는 만무하다. 나는 결혼 이후로 쭉 남편을 향해 날이 서있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제 페이스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모습이 가까운 이들에게 안 드러날 리 없었고, 개별로는 모르겠지만 매콤 달달하고 쫄깃한 떡볶이와 탱글하고 구수한 어묵이 어울려 시너지를 내는 관계처럼 우리 부부가 그리 비치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저 우리는 혼인한 ‘부부’라는 이유로, 두 아이의 공통된 ‘부모’라는 이유로 한통속에 들어간 채 호명되었다..... 만,
그 소박한 이름표의 새긴 글자가 채 마르기도 전, 한 해도 지나지 않아 떡볶이와 어묵은 결별을 선언했다. 정확하게는 어묵은 제자리를 지켰고에 떡볶이가 자신의 이름표를 갈아치웠던 거였다.
나는 새 이름으로 태어나길 바랐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려 부러 굽혔던 허리를 펴고 싶었다. 유아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떡볶이’ 대신 어른스럽고(?) 독립적인 상징으로 명명되길 바랐다. 아이들은 자라 언젠가 우리 품을 벗어날 터이지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ㅇㅇ엄마’로 불리기도 원치 않았다.
나름의 심사숙고로 온갖 의미를 끌어다 부여한 새 별칭(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겠다)을 스스로 지어 앉혔고, 사람들에게 적극 알렸다. 불가피한 상황(학부모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하는 자리)이 아니면 이름 대신 꼭 불러달라는 내 확고한 의지로 20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도 그때 지은 별칭은 낡고 익숙하게 통용되고 있다.
당시 떡볶이를 갈아치운 직후 주변인들은 재미 삼아 놀리곤 했다.
「어라, 어묵이 떡볶이한테 버림받은 거네. 」
남편도 웃으며 그에 맞장구쳤다. 요새도 간혹 누군가 ‘어묵’의 탄생설화를 그에게 물을 때면 아득한 지난날을 더듬으며, 홀로 남겨진 자의 소회를 우스개를 섞어 탄식하곤 한다. 물론 남편은 나와 달리 ‘어묵’이라는 음식으로 매단 명찰을 자신의 정체성을 한정시키는 주홍 딱지로 여기지는 않는다. 떡볶이와의 결별도 해프닝으로 치부할 뿐 눈곱만큼이라도 진심으로 섭섭해하는 눈치도 아니다. 더불어 그는 내가 나만의 이름표 달기에 연연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눈치도 없다. 먼 곳에 살던 큰아버지가 2년 만에 문득 면사무소로 달려가 즉석에 지어 출생 신고한 ‘꽃부리 영, 계집 희’를 내 소녀시절에 왜 그리 마뜩잖아하고 부끄러워했는지 그가 궁금해할 리 없으니까.
카톡 전에 이미 떡볶이는 완성해 둔 상태였던가. 답 톡을 하고 오분 여 만에 남편은 돌계단을 올라 내가 사는 집 현관문을 두드린다. 나는 그에게서 김이 오르는 붉은 떡볶이 사발을 건네받는다. 불어난 라면 줄기와 봉 어묵이 쌀떡과 뒤섞여 있다. 잘 먹겠다는 익숙한 인사로 그를 돌려보내고 나는 중얼거린다.
‘참나, 떡볶이에는 납작 어묵이라 매번 말했는데도....’
물론 봉이건 납작이 건 어묵이 빠진 떡볶이도 나는 좋아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결혼 20년 만에 남편은 자신 있게 손수 만드는 요리 1호로 떡볶이를 탄생시킨 이듬해에 2호를 개발해냈다. 그가 술안주 삼아 즐겨 끓여 먹는 어묵탕... 나는 그의 어묵탕을 두어 번 먹어본 후 입맛에 맞지 않아 맛보기를 그만두었다. 어느새 남편도 자신이 끓인 어묵탕을 내게 권하지 않고 있다. 떡볶이와 어묵 사이의 특별한 거리를 알아차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