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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안녕 Dec 27. 2021

마당의 표정

콘크리트의 민낯


뭐야, 하나같이 시골스러운 멋이 없네.


시골집 마당이 대부분 콘크리트로 덮여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귀촌하고 나서였다. 건조하고 창백하고 딱딱하기 그지없는 콘크리트는 내가 동경하던 멋의 정반대 편에 선 질감이었다. 도식화된 감상의 잣대를 들이댔다.

 

콘크리트 = 차갑고 메마른 회색빛의 도시 이미지

흙 = 무성한 초록의 생명력을 품은 시골 이미지


귀촌하고자  품은 마음이 깊어지는 동안 채워지지 않는 허기는 집 구상으로 달랬다. 가장 오래도록 공들여 설계한 이미지가 바로 ‘마당’이었다.


마당은 절대 시멘트로 덮지 않을 거야.’


잡지에서 흔히 보던 넓은 잔디가 깔린 전원주택풍의 마당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잔디의 초록은 지루했다. 콘크리트보다야 더하진 않겠지만 주차장 역할로 어울릴 것 같은 자갈 깔린 마당도 바란 적 없었다.


그저 바람 부는 날엔 흙먼지가 폴폴 날리고, 비가 오면 군데군데 작은 물웅덩이가 고이고, 맑은 날엔 닭들이 땅을 헤집으며 모이를 찾아 종종거리고, 담벼락을 따라 작은 꽃밭이 둘러져 있는 그런 마당.


그냥 날것의 흙마당. 



꿈꾸던 시골로 이주한 지 몇 해가 지나서야 낡은 대문간과 담장을 헐고 앞마당 정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때가 온 것이다.

진정한 시골스러움을 '흙마당'을 통해 구현해보겠다며 호기로 비워둔 땅은 두 계절을 간신히 버텼다. 비 오는 날엔 신발 바닥에 빚처럼 들러붙는 진흙과 함께 어정어정 걸어 다녔다. 맑은 날엔 슬금슬금 땅을 따먹으며 번지는 풀들을 캐느라 허리가 비명을 질렀다. 한심한 꼴을 보고 혀 차는 소리들이 십 리 밖에서도 들려왔다.

누군가의 조언대로 자갈보다 저렴한 석분 더미를 두텁게 까는 것으로 중도 타협했지만 그마저도 한 해를 겨우 넘겼고 결국 두 손을 번쩍, 아니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차바퀴가 자주 구른  자리는 파여 흙과 물이 쉽게 고였다. 돌 틈도 아랑곳없이 번성하는 풀도 감당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파쇄석 조각으로 깔린 마당은 보기에도, 다니기에도 불편했다.


일상과 동떨어진 미학은 실용성과의 교집합을 찾아야 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현실적 대안, 아니 반영구적인 해결책을 구했다.

이윽고 레미콘 트럭이 도착했다.  너의 터전이 훼손되지 않게 영구히 박제하리라는 굳은 기세로 콘크리트 몰탈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숨통이 막힐듯한 무채색이 앞마당에 두텁게 포장되었다.

한동안 불편하고 아쉬운 마음은 따랐지만 인정했다. 내겐 하루새 소복이 날아든 풀씨를 아침마다 비질하는 마당쇠도 없고, 등 돌리면 솟아오르는 모진 잡초를 하세월 호미질할 어깨도 부실했고, 독한 풀약을 거듭 뿌려댈 배짱도 없었다. 현명한 해결책이었다.


어느덧, 초록의 과잉을 시골스러운 멋으로만 해석하지 않을 만큼은 시골사람이 되었다.

단순 주차장으로 변신한 우리 집 앞마당을 보며 체념과 자족에 익숙해질 무렵, 언제부턴가 다른 이웃의 마당이 내 눈에 들기 시작했다.

우리 앞마당의 주인은 차인지 냥인지...

그랬다. 무취와 몰개성으로 천편일률적이라고만 치부했던 콘크리트 마당에서 색다른 표정들을 발견한 거였다. 마당은 오랜 세월 집집마다 고유한 시간을 창작해내고 있었다. 세월이 남긴 주름처럼 금은 졌지만, 허트려지지 않고 단단한 바닥은 수많은 이야기를 떠받들고 있었다.

어느 집엔 색색의 크고 작은 화분에서 푸른 붓꽃과 분홍 패랭이와 흰 봉선화가 피어났다. 자동차 낡은 타이어는  드러누운 채 숱 많은 고춧대를 품고, 양지바른 어디서건 소인국 부족 같은 장독들이 볕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한 편에는 깨진 유리병이나 벽돌로 경계삼은 낮은 화단 안쪽으로 펼쳐진 소우주도 보였다. 해마다 작약꽃이 돋고, 대파가 무리 지어 키를 세우고, 잘린 부추가 다시 힘을 모으는 곁에 채송화도 낮게 퍼져가는, 콘크리트 마당 한 귀퉁이 제 몫의 터에 귀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바쁘고 고된 농부의 일상에 이만큼 마땅한 선택이 있을까.


키다리 접시꽃이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고, 호박넝쿨과 장미가 울타리를 감아 오르고, 붉은 고추와 깻단이 태양빛에 몸을 말리고, 순둥 한 개들이 제 구역이라고 아무렇게나 똥을 싸놓은...

질척이지도, 흙먼지를 날리지도 않는 밋밋한 낯이지만 그 집에 사는 이가 스케치하고 계절과 시간이 채색한 무수한 표정들.

때로는 그 모든 것에 군림하듯 경운기와 트럭이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여 쉬기도 하고, 일 년에 몇 번 반짝거리는 도시 승용차가 정갈한 그림을 잠시 완성하다 떠나기도 했다.

온갖 부침에도 쉽게 찢기거나 삭지 않는 캔버스 같은 마당이 거기 있었다.

 





이러저러한 일들에 밀려 우리 집 앞마당은 고유의 멋이 드러날만한 표정을 아직 갖고 있지 못하다.

예전의 나와 비슷한 취향이나 눈높이를 가진 누군가는 우리 앞마당을 흘낏보며 속으로 말할지 모른다.

참 멋없는 마당이네.’

다른 소리도 들린다.

마당 공사를 끝낸 봄, 집 앞을 지나가던 마을 어른들의 한결같은 목소리.


“아유! 이제야 훠~언해 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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