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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밤 Aug 25. 2022

오후의 산책

낮의 생각: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화책 <까만 옷만 입을 거야>의 유리는 미국 날씨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햇볕에 나가면 따뜻하고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하다고. 지금의 서울이 딱 그런 날씨다. 양지는 따뜻하다 못해 살짝 덥지만 음지는 선선한 데다가 바람까지 불면 상쾌하기까지 한 그런 늦여름의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오랜만에 약속이 없는 점심시간이었다. 보온병 하나를 챙겨 들고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공원으로 갔다. 오는 길에 산 커피와 샌드위치를 꺼내 벤치에 앉자 후덥지근한 기운이 올라왔다. 커피를 살 때까지만 해도 바람이 부는 것 같아 따뜻한 커피를 시켰는데 역시 여름의 더움은 쉽게 가시지 않구나, 생각했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며 아픈 아빠를 생각했다. 나이를 먹는 것과 병약해지는 인간의 생애주기에 대해 생각했고 코 앞에 닥친 전세 재계약과 여윳돈이 없는 상황도 잠시 떠올려보았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언제까지 회사를 다녀야 하나,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원론적인 고민에 도달했다.


그때 비둘기 여 일곱 마리가 사선으로 글라이딩을 하더니 내 앞에 착지했다. 비둘기 떼는 내가 먹고 있는 샌드위치를 맹렬히 노려보며 조금이라도 바닥에 흘린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먹겠다는 위협적인 날갯짓을 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자기들끼리 날개가 조금이라도 부닥치면 서로 머리를 쪼았다. 남의 밥그릇을 노리며 사는 삶의 태도가 바로 저런 것이다. 내 것에 눈독을 들이면 같이 어울리는 무리의 친구 새라도 대갈통을 부숴버리겠다는 호전적인 태도에 압도당한 나는 비둘기 무리의 기세에 눌려 샌드위치를 먹는 둥 마는 둥 그 자리를 벗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잔디를 피해 공원의 외각으로만 걸었다. '잔디를 밟지 마시오'라는 표지판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었다. 똑바로 걷다가 옆으로 꺾기도 하고 뒤로 다시 돌아가기도 하고 꾸불꾸불 천천히 걷다가 멈춰 섰다가 하늘을 바라보고 또 걷고를 반복했다.


공원의 녹음이 유난히 짙었다. 하늘은 푸르렀다. 고추잠자리들은 꼭 두 마리씩 붙어서 공원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맴맴- 매미는 지칠 줄 모르고 울었다.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어긋난 것 없이 평화롭고 단정했다. 그 풍경의 일부가 되자 혼란스런 내 마음도 어떻게든 정리가 되는 듯했다.


인생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질 않는다는 진부한 생각. 때로는 그 뻔한 마음가짐이 나를 살게 한다. 그저 하루하루 내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자고.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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