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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밤 Nov 26. 2022

3일의 휴가

미지근한 마음에 불을 지피려면

바쁘게 지냈다기보다는 생각이 멈춰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아빠를 잃은 슬픔은 분노가 되었고 어느 순간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삶이 덧없다는 걸 꼭 이렇게 고통스럽게 알아야만 했을까. 


첫 두 달은 아빠의 신변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세 달째가 되니 대부분의 일들이 정리가 되고 나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빠가 없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어떤 글도 쓰고 싶지 않았고 읽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내 기분을 공유하고 싶지도, 누군가에게 이해를 바라지도 않은 시기였다. 어딘가로 숨어 버리고 싶었던 나는 의외의 메일을 받았다.


내 이력이 마음에 드니 인터뷰를 보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그것도 두 곳에서. 결과와 상관없이 나는 홀가분한 마음이다. 인터뷰를 보지 않았다면 나는 더욱 깊숙이 굴을 파고 내려가 혼자만의 어둠 속에 침잠해 있었을 것이다. 억지로 일어나 눈곱을 떼내고 머리를 단정히 하고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내가 누군지 소개하기 시작했다. 10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의외로 기운을 차렸다. 내가 소개하는 나라는 사람이 꽤 열심히 살아온 것처럼 보였고 나름의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 것 같았다. 막상 사람들을 마주하니 연습도 하지 않았던 의욕들이 터져 나왔다. 마치 즉흥연기를 하는 배우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나한테 이런 모습이 있었는가 할 정도로 열정 어린 모습을 인터뷰 내내 보이고는 인터뷰가 끝나면 공허함이 밀려들었다. 이리저리 널뛰는 감정을 다독여야만 했다.


모든 인터뷰가 끝나자 이제는 스스로에게 휴가를 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곳이 강릉이다. 즉흥적으로 숙소를 구하고 목적지를 정했다. 산도 있고 바다도 있으니 갈 곳은 충분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산도, 바다도 가지 않았다. 2박 3일간의 시간은 대부분 숙소에서 보냈다. 


나는 담요를 덮어쓰고 평상에 누워 여러 단상들은 자주, 짧게 떠올리고는 두세 마디 정도의 생각을 덧붙이다가 또 다른 주제로 옮겨가고를 반복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여행지의 음식과 풍경. 나는 어느 순간부터 여행지의 음식도 풍경도 괘념치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느 것도 신이 나질 않는다."


"고통. 삶을 살아가는 데 고통은 필연적이라고들 하는데 주위를 둘러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진 않다. 자신의 아픔을 매우 잘 숨기거나 아님 자신이 느끼는 게 고통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무감각해진 것이 분명하다."


뭐 하나 대단한 깨달음에는 가닿지 못했다. 나아가지 못하는 생각들에 머리가 복잡해지면 정세랑 작가의 <이만큼 가까이>를 읽었다. 다시 소설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상태로는 회복이 된 것 같았다. 한 달 전쯤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를 읽다가 첫 번째 챕터를 끝내지 못하고 오열했는데 이번에는 큰 문제없이 한 권을 다 읽어냈으니 말이다.


딱 한 번 강문해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바람이 불고 사람이 많아서 근거리에 있던 경포호를 걸었다. 목도리를 풀면 서늘하고 다시 두르면 더워지기를 반복하는 날씨였다. 신고 있던 부츠가 덜그럭거렸다. 축구부 학생들이 반팔 반바지를 입고 조깅을 하고 있었다. 제법 추운 늦가을의 날씨인데도 소년들의 몸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선두 그룹으로 달리는 대여섯 명의 학생들 뒤로 조금씩 처지는 학생들이 자기만의 속도로 뛰어가고 있었다.


"저렇게 뜨거웠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던가. 어쩌면 나는 다시 뜨거워지고 싶은데 그럴 명분을 찾지 못해 화가 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강릉에서 나는 또 다른 인터뷰 제안 메일을 받았다. 세 번째 회사다. 나는 별로 고민할 것도 없이 인터뷰를 하겠다고 회신을 보냈다. 결과가 어떻든 지금은 휴식보다는 움직이는 게 더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지근한 마음에 불을 지피려면 기름이든 땔감이든 뭔가를 넣어야 한다.


Photo by Sekyung U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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