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두 번 입장하다
둘이서 잠시 고민하다가 우리는 다시 성당 입구 쪽으로 가서 사정해 보기로 하였다. 물론 안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밑져야 본전 아닌가? 그 선생님이 나보다 영어 실력이 나아 입구 쪽에 서 있는 직원과 이야기를 하였다. 가만히 들어보니 자신은 사정상 늦게 와서 성당에 입장을 못했으니 늦었어도 입장을 허락해 줄 수 있느냐는 요지의 말이었다. 직원들은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고 그 선생님은 그라나다에서 왔다고 답했다.
사실 그 선생님은 전날 그라나다에서 바르셀로나로 온 것이 맞았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한참 서로 의논을 하더니 다시 들어가라고 허락해 주었다. ‘이게 된다고?’ 깜짝 놀랐지만 다시 줄을 서서 짐 검사를 받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코드를 읽으니 기계는 거짓말을 못했다. 기계에서 재입장했다는 표시로 ‘삐’ 소리가 난 것이다. 그러니 직원들은 ‘너희들, 늦은 것이 아니네.’라는 듯한 말을 하였다. 정말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무슨 일인지 쳐다보는 듯했다.
‘앗! 창피’ 어떡하지? 잠시 망설이다가 이런 경우 최선의 방법은 사실대로 고백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어눌한 영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이미 성당을 보았고 이렇게 기념품까지 구입했다. 그런데 성당 뒤로 가고 싶은데 밖으로 나와버렸다. 우리는 성당 뒤쪽 편으로 가고 싶다. 그래서 물어보았다.’라고.
직원들에게 솔직하게 고백한 것이 통했을까? 그들은 잠시 의논하더니 다시 들여보내 주었고 성당 뒤편으로 나가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비록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그들의 친절함 덕분에 우리는 성당 뒤편이 아니라 성당의 서쪽 편이라는 것을 알았고 덕분에 우리는 나가서 가우디가 일꾼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건축한 학교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성당 서쪽 편 수난의 파사드 조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서쪽에 위치한 수난의 파사드는 가우디의 업을 이어받은 수비라체의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수난의 파사드에는 예수가 제자에게 배신당하는 장면, 예수를 심판하는 자들이 자신이 이 심판에 책임이 없다고 손을 씻는 모습,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받는 예수,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차마 볼 수 없어 얼굴을 가린 마리아의 모습까지 예수의 죽음에 이르는 안타까운 수난의 과정들이 조각되어 있다.
성당 앞의 모습이 생생하고 자연스럽게 또 이해하기 쉽게 풀어준 조각이라면 성당 뒤편의 조각 모습은 그러한 예수의 삶이 가장 단순하고 간결하게 조각되어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가장 극적인 슬픔의 장면에서 화면은 슬로비디오로 천천히 흘러가는데 아무런 효과음이나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그 장면을 보며 우리의 상상력이 극대화되어 슬픔이 보다 깊게 우러나오는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성당 뒤편의 조각이 나에게 꼭 그런 모습으로 다가왔다. 단순한 몇 개의 선으로 표현된 조각이 자세하고 세부적인 설명보다 단순해서 오히려 더욱 큰 감정의 울림을 주었다고나 할까?
특히 대제사장들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잡아 빌라도의 법정에 세우기 위해 찾아왔을 때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고 은화 30냥에 예수를 팔아버린 제자 가롯 유다는 스승에게 입맞춤으로써 예수임을 그들에게 알려 주는 ‘배반의 입맞춤’ 장면은 굵은 선으로 조각된 군더더기 없는 모습이 관찰자인 나에게 더 화가 나고 속상하고 울분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두 번 입장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으나 가우디가 혼신의 정성을 기울여 신께 바치는 성당이라는 것이 충분히 느껴졌고 가우디는 천재이자 완벽한 건축가로서 정말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신앙심을 가지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온전히 자신의 삶으로 나타내기는 어렵다고 볼 때 가우디는 정말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