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 공간 속에 가두는 전시와, 나를 이 공간 밖 세상으로 던지는 전시가 있다. 작년 8월 30일부터 10월 8일까지 국제갤러리 한옥 공간에서 진행된 양혜규 작가의 프레젠테이션 《동면 한옥》과 아르코미술관에서 8월 11일부터 11월 19일까지 개최되었던 회화작가 노원희의 개인전 《노원희: 거기 계셨군요》은 관람자를 가장 내밀한 공간 안에서 숨쉬도록 하기도, 가장 바깥의 치열한 생존의 현실로 내몰기도 한다.
서울 ‘프리즈 위크’ 기간이었던 9월 초, 국제갤러리의 별관에 해당하는 한옥 공간을 양혜규 작가의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방문하였다. 좁은 입구를 지나 한옥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은은하게 느껴지는 한약재 냄새를 맡으며 곳곳에 흩어져 놓여 있는 양초들을 지나다니며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었다. 빨래 건조대와 블라인드, 거울 등의 오브제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명절날 놀러간 할머니댁의 창고를 열어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우리가 창고 안쪽 선반 위에 물건들을 ‘전시’하고 ‘진열’해두기보다는 ‘보관’하는 것처럼, 형광등 대신 양초의 빛이 밝히고 있는 한옥 공간 속에 양혜규 작가의 작품들은 보관되어 있다.
처음 전시를 보러 갔을 때는 한낮의 여름(14시)이었기 때문에 입구 가까이에서는 오히려 양초 불빛이 희미하게 보일 만큼 전시 공간 내부가 밝았으나, 저녁 시간대(19시)에 다시 전시공간에 들어서자 캄캄한 공간 속 양초 불빛이 그 무엇보다 밝게 느껴졌다. 저녁시간에 입장하면 입구에서 관람자에게 손전등을 하나씩 나눠주는데, 이는 창고 속에 보관되어 있는 물건을 찾는 기분을 들게 하기도, 전시 제목의 ‘동면’을 떠올리게도 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 연약해졌을 것만 같은 (실제로는 튼튼하다) 가옥 내부를 거닐며 관람자는 각자의 기억이 담긴 일상의 사물을 떠올리고, 한옥이라는 물리적 공간 속에서 ‘동면’ 상태에 빠진 채 자신의 기억이라는 시간적 공간 속에도 갇힌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잠재력을 지닌 ‘동면’ 상태의 전시 공간 속에 나를 가두고 추억에 빠질 수 있다.
한쪽 구석에는 양혜규 작가의 대표적인 조각들이 놓여 있고, 그 맞은편의 도배가 덜 끝난 듯한 벽에는 이제껏 많이 조명되지 않았던 평면 작업들이 걸려 있는 방식의 전시를 통해 오브제로 이루어진 작품들이 갖는 고유한 장소성과 시간성, 관람객마다 다른 추억에 깃든 특별한 공간성과 시간성이 교차하는 공간 속에 갇히게 된다.
“빨래 건조대라는 게 필요할 때는 펼쳐서 쓰고, 안 쓸 때는 또 접어서 감추어 두는 거잖아요. 우리의 어떤 삶의 표시 같은 거죠. 매우 사랑하는 가족이지만 남에게 드러내 보여 주기 부끄러울 때도 있지 않나요. 접었다 펼쳐지는 빨래 건조대를 통해 그런 얘기들을 해 보고 싶었어요.”
토테미즘과 무속 신앙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이 곳곳이 놓여 있어 전래동화나 옛날 이야기의 세계 속에 들어간 것 같기도 하다. 광원 조각의 연작 중 하나인 ‘토템 로봇’과 인조 짚을 엮어 만든 연작들인 ‘중간 유형 – 서리 맞은 다산의 오발 이무기’, ‘중간 유형 – 탄소 맞은 수컷 칠발 이무기’ 등의 작품들은 세워져 있기도, 나무를 감싸는 형태로 늘어져 있기도 하다.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진 작품들은 각기 다른 형태로 보관된 채, 관람객들을 개인의 기억이라는 시공간에 가두어 밀도 높은 예술적 경험을 제공한다고 느꼈다.
거리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을 시점에는 혜화의 아르코미술관을 방문해 노원희 작가의 개인전을 관람했다. 1980년대 우리나라의 민중미술을 이끌었던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였던 노원희의 예술적 지향점이 돋보이는 전시였으며, 한국 현대사의 변천에 따라 개인과 집단이 처한 현실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러나 여전히 고통받고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을 조명하고 그들이 처한 현실 옆에 함께 서 있도록 관람객을 전시장 바깥의 현실로 밀어낸다.
“1980년도 현실과 발언 창립전이 검열로 인해 무산되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열리는 노원희 작가의 개인전은 미술관 개관 50주년을 한 해 앞두고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아르코 미술관장이 밝힌 것처럼, 많은 작품 속 그려진 그림자와 같은 인간의 형상은 “우리 시대의 생존과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받고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다는 작가의 고발이자 반성, 성찰이 담긴 전시였다. 작가노트에서 끄집어 낸 문장인 “거기 계셨군요”는 사회 속에서 비가시화되고 소외되던 누군가를 발견하고, 그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전시를 관람하는 개인은 의도적으로, 혹은 자신도 모르게 관심을 끄고 살아가던 사회의 타자들의 존재와 그들의 투쟁을 직시하도록 지극히 현실적인 투쟁의 현장으로 내몰린다.
익숙한 화이트 큐브의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닥뜨리게 되는 작품 ‘탑’은 의족과 의수를 한 산업재해의 피해자들이 몸으로 탑을 쌓은 형상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불안정한 모습은 마치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노동 현실을, 모순적인 산업 자본주의 체제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이는 끝없는 외주화, 하청의 방식을 통해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노동자 착취의 시스템을 고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노동자가 입고 있던 작업복을 사복으로 갈아입혀 병원으로 보내는 기업들의 은폐를 다룬 작품 ‘사복으로 갈아입히고’에는 작가가 피해 노동자들의 발언을 천에 적어 붙여두었다. 용산 참사, 세월호 사건, 국정농단, 태안화력발전소 사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등의 산업재해와 국가적 재난을 르포와 같은 형식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가득 찬 전시장에서 작가의 글씨와 작품에 담긴 노동자들의 목소리, 캔버스 위의 붓질 등이 형체를 갖고 전시 공간을 돌아다니며 관람객들을 현실과 유리된 화이트 톤의 정갈한 전시장에서 벗어나 차별적인 현실 속 소외받는 이들의 손을 붙잡을 수 있게끔 한다.
예술이란 우리를 어딘가로 밀어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관람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의 자의식과 기억의 공간 속에 갇히게 할 수도 있으며, 냉혹하고 각박하지만 마땅히 함께 해야 할 현실 사회로 밀어낼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미술 아닐까. 전시를 관람하며 작품과 작품이 놓여져 있는 공간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떠올리게 되는 경험은 아주 소중하다. 양혜규와 노원희 작가의 전시는 나에게 매우 다르면서도 동일한 예술적 체험 – 공간 속에 갇히거나 공간 밖으로 내몰리는 - 을 가능케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양혜규 작가가 선택한 오브제들과, 노원희 작가가 선택한 작품의 소재들 모두 시간성을 명확히 띠고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기에, 전시 공간 속에서 교차하는 시간성 역시 느낄 수 있었다.
1. 강지원 ⏐ 양혜규 “내 작품 어렵다고요? 다 아는 얘기예요” (2020.10.05., 한국일보)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100509240003334
2. 이준형 ⏐ 2023 아르코미술관 기획초대전 《노원희: 거기 계셨군요》 보도자료 (2023.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