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read ⎮ December 25, 2023
작년 한 해의 마지막 책으로 이 책을 읽었다. 분명 내년(2024)에는 열심히 읽은 책들을 잘 소화시키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과 함께, 이때 올해(2023)의 마지막 책을 정리해두었던 것 같은데..
사실 제대로 정리해두지 못했다 ^_ㅠ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자 노션에 정리해두었던 글을 여기 올린다.
분류라는 행위가 인간의 편리를 위함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우리는 학문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일상 속 사람들을 만날 때도 모든 것을 분류하려고 하지 않는가. 당신의 mbti가 뭐냐는 짧은 질문에는: 당신이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걸 선호하는지 / 이미 잘 아는 사람들과 만나는 걸 선호하는지, 샤워할 때 잡생각을 많이 하는지 /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인지, 고민을 말했을 때 현실적인 조언을 듣고 싶어하는지 / 공감과 위로를 먼저 받고 싶어하는지,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스트레스 받는지 / 계획이 있으면 스트레스 받는지 여부에 따라 상대를 분류하려고 하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판가름하던 과거와 다를 바 없이, 어쩌면 더 복잡해진 상대를 간파하고 괜한 에너지를 쏟지 않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분류한다.
우리는 세상을 기본적으로 나를 기준으로, 나와 다른 무언가로 인식하기에 분류라는 것 역시 나와 다른 무언가를 내가 가진 기준을 중심으로 나누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분류를 하는 사람이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은 이러한 분류를 더 쉽게 수용할 것이고, 개인의 편견과 아집이 어쩔 수 없이 당연하게도 스며들어있는 분류는 더 이상 한 개인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이 되어 그 편견과 아집을 더욱 강화시킬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분류를 하면 안 되느냐? 만약 분류를, 구별짓기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이쯤에서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라는 책을 다시 제대로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심금을 울리는 문장들이 꽤 많았고, 그 어떤 책도 이 책만큼 논픽션 에세이의 매력을 잘 보여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작가가 스토리텔링의 귀재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메세지까지 다다를 때까지 차근차근 빌드업을 쌓은 뒤 책 제목이 이러한 이유와, 자신의 인생 이야기로 마무리 짓는 방식이 정말 놀라웠다. 마치 세련된 추리소설을 읽는 느낌으로, 큰 물결을 따라가는 방식의 에세이라서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읽었다.
지수 집 소파에 앉아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한 해의 마지막 책으로 읽기에 딱이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얄팍한 편견의 테두리인 범주를 무너뜨리고 나면, 우리는 무엇을 마주할 수 있을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춤추는 별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는 말과, 헤세의 <데미안>에서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모두 떠올랐다. 내가 인지하고 인정해야 하는 혼돈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내가 깨뜨리고 나와야 하는 세계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의 나는 무엇을 새롭게 검토하고, 무너뜨리게 될까?
아래는 독서모임에서 승하 언니가 진행해줬던 발제 질문들이다. 독서모임에서는 다 다루지 못했지만, 혼자서 생각해보아도 충분히 좋은 질문들인 것 같아 노션에 남겨 두었다.
분류에 대하여
Q. 분류학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학문입니다. 또 앎은 분류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분류에는 어쩔 수 없이 위계가 있는 것 같아 보여요. 나누고, 정의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으며 윤리관이 있어야 한다면 어떤 것일까요?
Q. 본인만의 정리하는 체계, 기준이 있나요? 세상을 가르는 기준이나 어떤 것은 비슷하고 어떤 것은 다르다고 판단할 때 쓰는 잣대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판단을 내리기 보다 혼돈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언제 그렇게 느끼는지 궁금합니다. (생물을 정의하는 일,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 가장 현대적이고 과학적일 것 같은 이 행동들이 실은 무엇보다 종교적인 행위일 수 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하여
Q. 밀러는 마음 속에 큰 혼란을 겪던 중 알게된 조던의 이야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녀는 평생 해온 일이 거의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에도 멈추기를 거부한 조던을 롤모델로 삼았습니다. 자신의 롤모델이 있나요? 꼭 사람이 아니어도, 여럿이라도 괜찮습니다. 뭐라도 닮고 싶은 것, 대상에서 찾고 싶은 생의 방식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Q. 조던과 밀러는 모두 몰입을 경험합니다. 어떤 일에 맹목적으로 빠지는 일은 성장을 가능하게 하지만 되레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조던에 경우 생물의 위계적 질서에 몰입한 나머지 오생학에 빠지고 살인까지 하게 되는데요, 몰입이 주는 즐거움과 부작용에 대해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물고기에 대하여 (2023 ver.)
Q. 올해의 ’물고기‘는 무엇이었나요? 최근에 마주한 가장 큰 편견, 그것을 마주했을 때에 감정과 ‘편견‘이나 ’범주‘를 포기했을 때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있었나요?
쿠키질문
Q. 당신은 J(분류좋아) or P(혼란좋아)?
Q. 롤모델이 모종의 이유로 사라진 적이 있다면…
Q. 믿고 있는 미신 혹은 강한 신념이 있다면?
Q. 천성적으로 여겨지는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혼돈이 그 사람을 집어삼킬 것이다.
혼돈은 부러져 떨어진 나뭇가지나 질주하는 자동차, 총알 하나를 거느리고 밖에서 치고 들어가 그를 으스러뜨릴 수도 있고, 아니면 반란을 일으키는 그 사람의 몸속 세포들과 함께 안에서 박차고 나와 그를 해체해버릴 수도 있다. 혼돈은 당신의 화초를 썩어 물러지게 하고, 당신의 개를 죽이고, 당신의 자전거를 녹슬게 할 것이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을 부식시키고, 가장 좋아하는 도시를 무너뜨리고, 당신이 간신히 쌓아올린 모든 성스러운 장소를 폐허로 만들 것이다.
혼돈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이라는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시기의 문제다. 이 세계에서 확실한 단 하나이며,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주인이다. 15-16
“작은 것들은 아름답지는 않아도, 단 한 종류의 큰 꽃 백 송이보다 내게는 더 큰 의미가 있다. 미적 관심과 구별되는 과학적 관심을 보여주는 특별한 증거는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게 마음을 쓰는 일이다.” 28
아가시는 자연 속에 신의 계획이 숨겨져 있다고, 신의 피조물들을 모아 위계에 따라 잘 배열하면 거기서 도덕적 가르침이 나오리라고 믿었다. 자연에 도덕률-위계, 완벽함의 사다리 혹은 “등급”-이 감춰져 있다는 이런 생각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꼭대기에는 인간이 있고, 이어서 동물과 곤충과 식물, 바위 등으로 이어지는 연속체상에 모든 생물을 하등한 생물부터 신성한 생물까지 차례로 배열할 수 있다는 “신성한 사다리”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구상했고, 후에 “스칼라 나투라이Scala Naturae”(자연의 사다리)라는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아가시는 생물들을 제대로 된 순서로 배열하면 신성한 창조주의 의도뿐 아니라 어쩌면 더 진보할 방법에 관한 실마리까지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가시가 보기에 어떤 위계들은 아주 명백했다. 예를 들면 자세가 그렇다. 인간은 “하늘을 바라보며” 직립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지만, 물고기는 “물속에서 엎드려” 있다. 그런가 하면 모호한 위계들도 있다. 앵무새, 타조, 명금류가 그렇다. 이 가운데 어떤 새가 사다리에서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아가시는 그 답을 알아낼 수 있다면 신이 더 중요시한 것이 무엇인지, 그러니까 언어인지, 크기인지, 노래인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43-44
마치 내가 살아오는 내내, 그 질문을 할 순간만을 열렬히 기다려왔다는 듯 아버지는 내게 인생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통보했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54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라고 아버지는 내게 알려주었다. 혼돈이라는 막무가내인 힘의 거대한 소용돌이, 그것이야말로 우연히 우리를 만든 것이자 언제라도 우리를 파괴할 힘이라고 말이다. “혼돈은 우리의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우리의 꿈, 우리의 의도, 우리의 가장 고결한 행동도. 절대 잊지 마라.” 데크 아래 솔잎들이 쌓인 땅을 가리키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한테는 네가 아무리 특별하게 느껴지더라도 너는 한 마리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걸. 좀 더 클 수는 있겠지만 더 중요하지는 않아.” (…)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좋아. 이제 이게… 전체 시간의 길이라고 생각해보자.” 아버지는 자기 가슴 앞에 펼쳐진 눈에 보이지 않는 광대한 시간의 선을 손으로 더듬었다. “여기서 인간이 존재한 기간은 요만큼이야!” (…) “게다가 우리는 아마 곧 사라지게 될 거야. 그러니까 만약 지구 저 멀리서 떨어져서 본다면…” 여기서 아버지는 혀를 차서 끽끽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지. 거기엔 행성들이 있고, 그 너머엔 더 많은 태양계가 있어…” 55-56
이윽고 다윈은 종이, 그리고 사실상 분류학자들이 본질적으로 불변의 것이라 믿었던 그 모든 복잡한 분류 단계(속, 과, 목, 강 등)가 인간의 발명품일 뿐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끈임없이 진행되는 진화의 흐름 주위에 인간이 우리 ‘편리’하자고 유용하지만 자의적인 선들을 그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투라 논 파싯 살툼Natura non facit saltum”(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이라고 썼다. 다윈에 따르면 자연에는 가장자리도, 불변의 경계선도 없다. 67
철학에는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은 정의, 향수, 무한, 사랑, 죄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이 천상의 에테르적 차원에 머물면서 인간이 발견해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가 그것들의 이름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개념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가 된다. 우리는 전쟁, 휴전, 파산, 사랑, 순수, 죄책감을 선언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 이렇듯 아이디어를 상상의 영역에서 세상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운송 수단인 이름 자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사상에 따르면, 이름이 존재하기 전까지 개념들은 대체로 불활성 상태에 있다고 한다. 93
인간의 정신이 세상을 조각해내는 일을 늘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라는 것, 우리가 만물에 붙인 이름들은 잘못된 것들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노예”는 인간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자유를 누릴 가치도 없는 존재였던가? “마녀”는 화형을 당하는 게 마땅한 존재들이었나? (…) 겸손을 유지하라는 것, 우리가 믿는 것들, 우리 삶 속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늘 신중해야 한다는 걸 되새겨보게 해주는 사례인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그 생각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94-95
이 세계에는 실재인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도 실재인 것들이. 어떤 분류학자가 어떤 물고기 위로 걸어가다가 그 물고기를 집어 들고 “물고기”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물고기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이름이 있든 없든 물고기는 여전히 물고기인데… 95
사람들은 물을 뿌리고 뿌리고 또 뿌렸다. 이토록 억눌리지 않는 불굴의 끈기는 어쩌면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그건 미친 짓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선에 대한 믿음을, 별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류의 가슴 속에는 존재하는 따뜻함에 대한 믿음을 조용히 실행에 옮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신뢰 비슷한 무엇인지도 모른다. 115-116
만약 분류학자들이 그것들을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종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종이 될 터였다. 116
<독수리와 파란 꼬리 스킹크>라는 단편동화에서 (…) 독수리는 내려와 새로 난 꼬리를 잘라 먹고, 도마뱀은 둥지로 올라가 알들을 먹어 치우는 일이 계속된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쪽도 완전히 패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꼬리에는 더 많은 알을 만들 고기가 충분하고, 알에는 또 하나의 파란 꼬리를 만들 고기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123-124
마침내 나는 가장 유의미한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손에 넣었다. 그것은 《절망의 철학》이라는 제목의 작고 검은 책이다. 그 책에서 데이비드는 과학적 세계관이 골치 아픈 점은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할 때 그 세계관이 보여주는 것은 허망함뿐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우리가 붙인 불은 숯을 남기고 죽는다. 우리가 지은 성들은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다. 강은 바닥을 드러내고 사막의 모래만 남긴다. (…) 어느 쪽으로 눈을 돌리든 생명의 과정을 묘사하려면 기운 빠지게 하는 은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127
그가 말하기를, 그 모든 것의 허망함을 곱씹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몹쓸 짓인 이유는, 진화가 선물한 그 소중한 전기를, 너무나 많은 경이로운 감각들을 느끼고 너무나 많은 과학적 수수께끼를 푸는 데 써야 할 그 신성한 이온들을 실존적 탐구라는 하수구로 흘려보냄으로써 글자 그대로 “몸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죽은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128
그가 쓴 단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신도 그 문제를 발견할 것이다. 그 진주알을 만든 최초의 작은 모래알 하나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이 말은 그가 자기 자신에게 결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바로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다. 사악함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그가 경고했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 (…)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으니까! 그조차도 절망에 완전히 집어삼켜지지 않으려면 그 거짓말이 진실이기를 믿어야만 했던 것이다. 133
그가 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의 순위를 정하지 말라고 그토록 뚜렷이 경고한 이유는 “어느 무리가 승리하게 될지 인간은 결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력으로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생태의 복잡성에 대한 이러한 조심스러움과 겸손함, 공경하는 마음은 사실 대단히 오래된 것이다. 이는 때로 “민들레 원칙”이라고도 불리는 철학적 개념이다.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189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서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227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신념이었다!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만 하고 그 주장만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이다. 그건 너무 음울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가장 심한 비난의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다. 228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분류학의 기술을 실행하고, 다윈의 충고대로 진화상의 친연성에 따라 생물을 분류함으로써 작동시킨 그 과정이 치명적인 발견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에 분류학자들이 타당한 생물 범주로서 “어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조류는 존재한다.
포유류도 존재한다.
양서류도 존재한다.
그러나 꼭 꼬집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235-236
우리가 어류에 대해 해온 일이 바로 이와 똑같다. 수많은 미묘한 차이들을 “어류”라는 하나의 단어 아래 몰아넣은 것이다. 실상 물속 세상을 들여다보면, 비늘로 된 의상 밑에 산꼭대기 산어류들만큼이나 서로 다른 온갖 종류의 생물들이 숨어 있다. 240-241
과학적으로 좀 더 논리적인 일은 어류란 내내 우리의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242
헤더는 하고많은 사람 중에 코페르니쿠스를 예로 들었다. 그 시 대 사람들이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면서 움직이고 있는 게 별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그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에 관해 생각하고, 별들이 매일 밤 그들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있는 천구의 천장이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서서히 놓아버릴 수 있도록 수고스럽게 복잡한 사고를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별들을 포기하면 우주를 얻게 되니까”라고 헤더는 말했다. “그런데 물고기를 포기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물고기의 반대편에 다른 뭔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물고기를 놓아주는 일은 그 결과로 또 다른 어떤 실존적 변화를 불러온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47
언니는 어류라는 범주 전체를 바로 손에서 놓아버렸다. 왜 언니한테는 그게 그렇게 쉬운 거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인간은 원래 곧잘 틀리잖아.” 언니는 평생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늘 반복적으로 오해해왔다고 말했다. 의사들에게서는 오진을 받고, 급우들과 이웃들, 부모, 나에게서는 오해를 받았다고 말이다.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252
그러다가 물고기에 관해 생각한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빛 물고기 한 마리가 내 머릿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모습을 그려본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자연 위에 그은 선들 너머에 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범주들이 무너질 참일까? 261
우리가 세상을 더 오래 검토할수록 세상은 더 이상한 곳으로 밝혀질 것이다. 261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263-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