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얼마 전에 갔던 친구의 결혼식에서 '인디언의 결혼 축시'가 낭송되었다.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의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이 있으리라
두 사람의 결합을 아름답게 축복하는 내용이었지만 사실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작은 의문이 싹텄다. 결혼이라는 문턱을 함께 넘은 이상, 우리는 이제 하나의 길을 함께 걸어 나가야 하는 것일까? 두 사람으로 살아왔지만 우리는 이제 하나가 되는 것일까?
'가족'이 되는 게 이상적인 결혼일까
물론 우리 부부도 서너 해 전 결혼식에서 '평생 함께하겠다'는 경건한 약속을 했다. 혼자일 때보다 함께일 때 행복하기 때문이었고, 결혼은 더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연인일 때 우리가 별개의 존재로서 함께하는 것과 결혼 후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함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그 차이를 결혼하기 전에는 또렷하게 알 수 없었으나 결혼 후에는 차츰 분명하게 다가왔다.
결혼 전에는 '배려'였고 '부탁'이었던 것이 결혼 후에는 '당연한 역할'이 됐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서로의 희생을 쉽게 요구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고 겪어온 가족이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가족과 소통하려 노력하지 않은 채 홀로 외로운 '가장'의 자리를 지켰고, 엄마는 엄마의 몫을 항상 나중으로 미룬 채 온 가족의 생존을 위한 돌봄 노동을 맡았다. 아빠와 엄마는 둘 다 일정 영역을 희생하거나 포기하면서 하나의 가정을 완성시켜 왔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으리라.
나는 이제야 부모님 세대의 결혼을 돌이켜본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는,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행복한 결혼생활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늘 무겁고 우울한 표정의 아빠와 늘 피곤하고 짜증이 나 있는 엄마의 이미지는 결혼해본 적 없는 젊은 세대조차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는 우스갯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결혼이라는 관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단순히 개개인의 '성격 차이'에 따른 어려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결혼 제도 자체를 거부하는 '비혼'이 힘을 얻고 있듯이, 제도적 문제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으리라 본다.
연애할 때는 생각할 필요 없던 문제가 왜 결혼 후에는 중요한 일이 될까? 연애할 때는 서로에게 집중했던 우리가 왜 결혼하면 서로의 부모님에게 집중해야 할까? 우리나라의 결혼 제도는 개인이 아닌 가족 단위에 지나치게 치중돼 있다. 오죽하면 결혼을 개인과 개인이 아닌, 가족과 가족의 결합이라 하지 않는가.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던 3년 전에도, 결혼 생활 4년차인 지금도 그 전제에 찬성할 수 없다. 남편과 나만 두고 생각해도 맞춰나가야 할 것들이 많은데, 어떻게 가족이라는 한 '집단'과 내가 서로 알아가는 시간도 없이 단숨에 결합할 수 있단 말인가.
결혼 생활의 가장 큰 장애물
결혼이라는 제도가 당연하다는 듯이 떠미는 여러 가지의 의무를 나는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부모님께 용건 없이 안부 전화를 하는 것도, 낯선 남편의 친척들 사이에서 명절을 보내는 것도, 남편의 식사와 빨래를 책임지거나 당연히 아기를 낳아야 한다는 압박에 순응하는 것도 싫었다. '결혼한 여자가~'로 시작하는 말 뒤에 따라붙는 사소하고도 큼지막한 편견 중에 내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뿐 아니라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결혼 후 스스로가 '가장'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회사를 그만두거나 이직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취미생활을 포기해야 할 거라 여겨 막연하게 자신을 방어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각자가 포기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서로에게 포기하길 원했던 것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혼 전에 나를 가장 너그럽게 대해주는 집단은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그런데 왜 결혼을 통해 가족이 되는 것은 우리를 다양한 의무와 억압으로 옭아매는 것일까? 결혼하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사실 그 제도에서 벗어나는 데에 가장 큰 장애물은 우리 자신인지도 모른다. 우린 나 자신을 지키기 이전에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지 않게 만드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고 배웠다. 어릴 때부터 접하고 따라온 다양한 사회적 관념들은,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죄책감을 부여했다.
그만큼 우리는 결혼이 쥐여주는 불편함을 스스로도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살아왔던 것이다.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나는 차곡차곡 쌓아올린 모두의 젠더 게임에서 홀로 위태롭게 빠져나와 있는 조각 같았다. 내가 모든 걸 망치는 것은 아닐까.
그와 나는 돈을 버는 이유가 다르고, 돈을 쓰는 방식이 다르고, 생활 습관이 다르고, 여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그의 부모님은 내 부모님이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세상은 우리에게 '하나'가 되길 요구하는 듯했다.
처음 둘이 한 집에서 사는 것도 어색했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각자의 가족과 인생에 깊이 관여해 우리 두 사람의 삶을 '오직 하나의 인생'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 거기에서 결혼 제도의 불편함은 시작됐다. 가부장제·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중심의 결혼 제도가 내게 맞지 않는 옷 같다고 느끼는 부부는 우리뿐만이 아닐 것이다.
결혼을 나에게 맞추고 싶다
결혼의 불편한 의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결국 이혼이나 졸혼, 즉 '결혼 제도'에서 벗어나는 것뿐일까 하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사실 나로서는 결혼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가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결혼 자체를 마다하는 것, 비혼으로 사는 것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어떤 형태로든 같이 살아가고 싶다면, 나는 지금의 결혼 제도 외에도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더 타당한 방법을 찾아내고 싶다. 부부가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우리가 운명 공동체라는 걸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는 그저 각각의 존재를 인정하되 팔을 뻗으면 닿을 만한 정도의 거리에서 나란히 걷는 일이 아닐까.
요즘 내 주변의 신혼부부들은 집에 TV가 있는 집보다 없는 집이 더 많다. 그렇다고 해서 미디어와 담을 쌓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은 인터넷으로 보기도 하고 3분짜리 하이라이트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도 한다. 거실 한복판에 커다란 TV와 소파가 놓여 있는 것이 당연했던 이전의 '가정집'과는 인테리어부터 그것을 즐기는 방식까지 달라지고 있는 모습이다. 결혼도 이처럼 내가 필요한 만큼만 취사선택해 살아갈 수는 없을까.
지금까지 나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왔다.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내 인생의 무게중심을 남편에게, 심지어 남편의 가족에게로 옮길 수는 없었다. 나는 결혼과 패키지로 따라온 원치 않는 의무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지금의 결혼이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제도를 '취사선택'해 좋은 것은 취하고 불편한 것은 버리며 살아가려 한다. '결혼한 이상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는 이기적인 행태'를 감히 '결혼'이라고 칭할 수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으니까.
'결혼하니까 좋아?'
결혼한 뒤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다. 나는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가는 과정에는 좋은 순간도 있고 싫은 순간도 있다'고 대답한다.
지금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의 이유는 단순히 결혼 덕분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싸우거나 힘든 순간의 이유 역시 결혼 때문이 아니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두 사람의 일이 온전히 두 사람의 손에 맡겨져 있을 때 모든 것은 훨씬 더 가볍고 쉬워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