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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곤 Aug 04. 2021

대형견이 없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

내향형 인간과 관종의 동거

여행을 좋아해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어떤 여행일까. 나는 내가 여행을 좋아한다고 해야 할지 썩 잘 맞지는 않는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여행의 묘미는 여행을 떠나기 전 설레는 시간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기대하는 즐거움보다는 실무적인 귀찮음과 번거로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 내게 여행의 즐거움은 계획을 짜는 순간부터가 아니라 실제로 그 장소에 도착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물론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게으름과 무기력이 여행지에 도착하는 순간 열정과 부지런으로 뒤바뀌는 것은 아니라서, 나는 여전히 한 장소에 오래 머물고 싶어 한다. 만약 여행의 근본적인 속성을 낯선 장소에서의 새로운 경험과 신선한 만남 같은 것이라고 본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여행보다는 그저 ‘일상의 배경을 바꾸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집을 떠나 새로운 장소에 가서 집에서 하던 일상적인 일을 계속하는 것, 나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하지만 대형견을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여행은 불가능한 일이 됐다. 여름이는 어딜 가든 활발하게 뛰어다니며 방전될 때까지 에너지를 소진시켜야 하는 생명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는 절대 놀지 않는다. 반려동물 전용 놀이터에 풀어놓고 ‘자, 놀고 와!’라고 하면 사람 옆에 망부석처럼 앉아서 기대에 찬 눈으로 공은 언제 던질 거냐고 기다린다. 보호자가 던지는 공을 물어오거나 보호자가 개에 빙의하여 같이 뛰어다녀야만 그걸 놀이로 인식하는 생명체인 것이다. 이토록 100% 상호소통적인 존재라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여름이에게 혼자 있는 시간 따위는 필요없다. 결국 남편과 나는 여름이가 갈 수 있는 곳, 여름이가 할 수 있는 활동을 기준으로 여행 계획을 짜는 것은 물론 꼭 반려동물 운동장을 코스에 넣어 꼼짝없이 야외에 자리를 잡고 공을 백팔십칠 번쯤 던져준다.   


여름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긴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에너지가 적은 사람이라 가끔은 에어컨이 나오는 시원한 카페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여행이 그립다. 올해 벚꽃이 질 무렵 마침 적당한 기회가 있었다. 찬기가 가시고 봄기운이 만연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고, 나는 주말에도 일할 때가 있는 프리랜서지만 당분간 한가한 스케줄에 별다른 변동이 없을 것 같았다. 내가 혼자서 강릉에라도 다녀오겠다고 하자 남편은 흔쾌히 여름이와 세 마리 고양이를 맡아주기로 했다. 참고로 남편은 내가 혼자 여행을 가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굳이 혼자 여행을 가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남편은 나와 비슷하게 내향적인 듯하면서도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친화형 성향이 한 스푼 정도 첨가되어 있다면, 나는 아주 가까운 사람들 말고는 잘 만나고 싶지 않은 극내향성 인간이다.      


그래서 혼자 강릉에 가서 뭘 했느냐 하면, 당연히 여름이와 함께 가면 절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했다. 일단 사람만 숙박할 수 있는 평범한 인간용 호텔을 예약했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 내부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 책을 읽거나 가만히 멍을 때리거나 했다. 2박 3일 일정이었는데 그동안 소설책 한 권과 에세이 0.5권을 읽었다. 여름이와 놀러가면 한 템포에(공을 던지고 여름이가 돌아오는 사이의 시간을 말하는 단위랄까) 두 줄도 채 읽지 못하고 결국 포기하는 것에 비하면 대단한 독서량이었다. 물론 애플워치가 내가 하루 권장 활동량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는 걸 빨간 반원으로 알려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나는 만족스럽게 호텔에 누워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맥주를 두어 캔 곁들인 뒤 털 한 올 없는 보송한 침구에서 잠들었다.      


일정 내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라든가 ‘영수증은 버려주세요’ 정도의 말만 했더니 마음이 흡족하고 평온했다. 택시를 탈 때도 카카오 어플을 이용하니 행선지조차 말할 필요가 없었고, 어딜 가나 시선을 끄는 대형견이 없으니 카페에 앉아 있거나 길을 걸을 때에도 얼마든지 조용한 엑스트라가 될 수 있었다. 한 곳에 앉아 있는 건 이제 한계라며 헥헥거리면서 마음을 조급하게 만드는 동물도 없다! 여름이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에너지가 적은 개 집사에게는 혼자 충전하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걸 이해해줄 거라 믿어본다. 



아마도 나는 강아지보다는 고양이형 인간에 가까울 것 같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거나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누워있으면 세 마리 고양이들은 내 곁으로 주섬주섬 다가와 각자 좋아하는 자세를 하고 눕는다. 늘 나와 찰떡같이 붙어있고 싶어 하는 아리는 주로 내 팔을 베고 눕거나 배 위에 올라오고, 제이는 한 뼘 정도 거리를 둔 채로 자리를 잡는다. 달이는 배가 고플 땐 큰 소리로 냥냥거리지만, 대부분은 적당한 자리에 배를 보인 채 발라당 드러누워서 기분 좋은 듯 그릉거린다. 나와 함께 별다른 활동을 하지는 않지만, 그냥 서로가 보이는 곳에 앉아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고양이들과 충분히 교감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럴 때면 물에 툭 떨어트린 잉크처럼 마음이 가장 부드럽게 풀어졌다.      


짧고 평범한 여행을 마친 뒤에는 털이 폴폴 날리는 침구가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집으로 돌아왔다. 고양이들은 내가 돌아와서 침대에 털썩 눕자 기다렸다는 듯 주변으로 모여들어 다시 낮잠 잘 자세를 잡았다. 여행을 다녀왔으면 이제 멈춰서 휴식을 해야지. 그렇게 한동안 천천히 누워 영혼을 잠재우고 있던 내가 고개를 한쪽으로 슬그머니 돌리면, 거기에는 어김없이 여름이가 있다. 내 몸을 베개 삼아 드러눕는 고양이들 틈에서 여름이는 침대 옆으로 다가와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기다린다. 슬슬 다 충전했으면 이제 같이 산책을 나가자고. 정적인 인간의 동적인 일상으로의 복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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