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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건 Jan 10. 2021

아주 무의미한 무언가는 아닌

브로콜리너마저 2집 <졸업>

 <졸업>은 밴드 브로콜리너마저가 2010년 발매한 그들의 두 번째 정규앨범 《졸업》에 속한다. 앨범 구성에서 주목할 부분은 앨범을 시작하는 첫 트랙이 <열두 시 반>이고 마지막 열한 번째 트랙이 <다섯 시 반>인데, 타이틀은 두 번째 트랙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과 열 번째 트랙인 <졸업>이라는 점이다. 구성에 서사를 조금 더하면 이렇다. ‘밤 열두 시 반부터 새벽 다섯 시 반까지 화자의 사고회로 따라가기’. 그러니까 그 사고회로의 시작과 끝을 타이틀로 설정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서사적 완결성의 근거는 각 트랙에서 찾을 수 있으나 우선 생략하자. <졸업>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될 듯하다.


 <졸업>은 2010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노래로 상을 탔다. 앨범이 아니라 수록곡으로 받은 경우인데, 심사평을 빌리자면 “‘졸업’을 우리 시대의 진솔한 노래로 받아들였”다는 평가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어딘가 부족하다. 첫째, 앞서 말한 ‘화자의 사고회로 따라가기’를 앨범 구성에 따라 차근히 이어가면 <졸업>의 등장이 굉장히 의아하게 느껴진다. 아홉 번째 트랙까지의 화자는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층위의 소재를 제재로 삼았는데 <졸업>은 사회적 문제(취업난 등)를 전면에 내세우기 때문이다(적어도 <변두리 소년, 소녀>의 서사와 <졸업>의 서사를 결부하는 것은 몹시 어려워 보인다.). 둘째, 진솔한 노래라고 평하는 것은 <졸업>의 후렴에서 ‘이 미친 세상에’를 반복해 외치는 어떤 메아리를 해석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1절과 2절의 가사인 ‘졸업 후 방황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부분에 대한 평이기 때문이다. 앨범 《졸업》이 두 타이틀을 대칭으로 배치한 것에는 틀림없이 어떤 의도가 있으리라 생각했고, 나는 그 ‘메아리’에서 그것을 찾았다.


 첫 번째 타이틀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은 실패한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를 위로하는 데 실패하고 상대에게 위로받는 데 실패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타인에게 전할 수 있는 '나'의 호감의 최대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도 위로가 될 수 없다면, 이것은 얼마나 무력한 상태인가. 이 실패에서 촉발된 사념이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에 대한 기록(변두리 소년, 소녀), 진정한 대화에 대한 고민(커뮤니케이션의 이해), 실천의 어려움(울지마), 세상에 대한 비관(마음의 문제), 자괴감과 자책감(이젠 안녕), 그러나 존재하는 거대한 죽음의 그림자(할머니), 그러므로 다짐하는 ‘너’에 대한 ‘나’의 의지(환절기)로 이어지는 것이 《졸업》의 굵은 서사다. <환절기>의 다짐은 꽤 밝고 명징해서 앞선 실패는 반복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졸업》은 놀랍게도, 다시 한번, 실패한다. 함께 졸업을 맞이하는 ‘너’에게 전하는 ‘나’의 말인 <졸업>에는 <커뮤니케이션의 이해>에서 그토록 바란 ‘말 다운 말’은 없다. ‘잊지 않을게’ ‘행복해야 해’ 따위의 불확실한 말뿐이다. 또 <변두리 소년, 소녀>에 등장한 청자는 <졸업>에서 그 존재가 확인조차 되지 않으며, <울지마>의 상대를 사려하는 마음이나 <환절기>의 굳은 의지는 온데간데없다. 곡의 마지막 반복되는 “이 미친 세상에”는 화자가 말하는 대상인 ‘너’가 과연 존재하는지 의심될 만큼, 공허하게 메아리친다. 이 부분에서 의문을 던지지 않은 청자는 실패에 몹시 익숙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수많은 현대인이 해당할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다시 실패하는 <졸업>이 서사적 연결에 순응하지 않음을 문제 삼지 않고 그저 ‘청년 세대의 현실에 주목’한 곡으로 일축했으리라.


 《졸업》에서 두 번의 실패를 듣기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다. 순도 100%의 감성을 표방한 밴드가 어째서 실패-성공이라는 희망의 서사가 아닌 실패-실패라는 절망의 서사를 채택했는가. 그리고 어째서, 우리는 위로받는가. 말마따나 <졸업>이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써의 효용만 지녔다면 그것은 통쾌함을 선사할 수 있었겠으나 청자를 위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난제의 해답은 앨범 제목이 ‘졸업’이라는 데 있다. 학교가 우리를 사회로 내보내기 위해 현실을 준비하게끔 교육하고 지도하는 공간이자 과정이라면 졸업은 그 종장終章을 맞이하는 행사다. 그러나 교육의 종료가 만반의 준비, 그 완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졸업을 통해 내보내진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그것에서 비롯된(혹은 비롯되지 않은-이것이 더 절망적이다)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졸업》의 서사는 이와 정확히 동형을 이룬다. 어떠한 실패로 시작한 우리는,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고 고민하지만, 끝내 다시 실패한다는 것.


 그러나 이는 완전한 절망이 아니다. 두 번의 실패로 지새운 밤이 끝나면 지친 ‘나’에게는 ‘아침 해가 날아든다.’ 앨범의 마지막 곡 <다섯 시 반>에서 불면의 밤을 보낸 ‘너’는 사실 ‘나’다. 그런 나에게, 이 곡은 어떤 초월적 입장에 서서 당연한 사실을 속삭인다. “울지 말고 잠이 들면 아침 해가 날아들 거야.” 울면서 잠들어도 아침 해는 온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태양의 희망적 상징성 따위의 것이 아니라 아침이 ‘온다’라는 사실이다(실제로 아침 해는 등교와 출근의 재촉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실패는 시시포스의 돌덩이처럼, 끊임없으리라. 그러나 이 밤은 특별하다. 그 까닭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형철이 적절한 것 같다. “진정한 사건이라면, 진실의 압력 때문에 그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밤을 통해 우리는 눈물만큼 흘러나오는 삶의 진실(우리는 끊임없이 실패한다는 것)에 ‘베인다’. 우리는 진실의 날카로움 때문에 그것을 알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애쓰지만,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아침이 오고 있으므로. 그러므로 두 번의 실패를 겪고 지새운 ‘밤’은 ‘최선을 다해 되돌려야 하는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다. 그리고 곡은 “알잖아”라는 한마디로 끝맺는다. 그렇다. 우리는 밤을 지새워도 혹은 그렇지 않아도 내일은 온다는 것을 이미 안다. 어쩌면 우리는 내일 밤도 실패할 것이고 모레에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평생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어김없이 날아드는 아침을 겪으며, 우리는 무수한 실패 속에서 한 번은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졸업》에서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앎’에 기대어 전하는 희망이고 우리는 그렇게 위로받는다.


 《졸업》의 두 번의 실패는 아마 우리가 가끔 지새운 밤이, 아주 무의미한 무언가는 아닌, 무엇이라는 말의 함축일 것이다. 《졸업》은 그 불면을 아주 성숙하고 정확하게 풀어내었으며 끝내 희미한 위로의 자국까지 남긴다. 《졸업》과 <졸업>을 들은 우리들은 언젠가 밤을 지새우며 덕원의 목소리나 그가 발음한 몇몇 단어와 문장들을 떠올릴 것이다. 음악이 삶에 흐른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것이지 않을까. 우리에게 정열이나 의지를 선사하지 않더라도, 그러니까 오래 침묵하고 문득 발화하는 '자국'의 온기만으로도, 음악은 예술이 된다. 


각주

* 신형철 <삶이 진실에 베일 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115, 한겨레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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